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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에로, 너를 보내며.

햇살가득한 2007. 2. 26. 23:49
씨에로, 너를 보내며.
번호 : 1969   글쓴이 : 김삿갓
조회 : 125   스크랩 : 0   날짜 : 2005.01.28 22:55
내가 너를 처음 본 것은 네가 막 태어나고 한 달 쯤 되었을 때였단다.
먼저 직장을 잡은 내 친구가 너의 주인이었지.
그 친구가 너를 끌고 다닐 때 나도 언젠가는 너같은 멋진 차를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지.
내 친구는 살살 감기를 앓기 시작하는 너를 걱정 했단다.
그리고 너를 내게 넘겨 주었지.
얼마에 팔 수도 있었겠지만 그 친구는 너를 아끼는 마음에 그냥 넘겨 주었지.
난 기껏해야 너를 목걸이와 귀걸이와 맞바꾸었지.
그렇지만 난 네가 그 자잘한 금붙이의 가치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진한 핏빛의 너는 나를 편안히 받아 주었지.
내가 헐레벌떡 출근을 서두를 때도 넌 나를 근무지까지 태워다 주었고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 너 또한 기쁨의 엔진을 돌렸지.
그런데 너의 그 자잘하게 시작된 감기가 좀 깊어지는가 싶었어.
타이밍벨트를 갈고 엔진 오일을 교환했더니 너의 그 쉰 목소리는 좀 나아졌지.
너도 기억하지?
몸에 속옷이 착 달라 붙듯 너와 나도 한 몸이 되어 다닌 걸.
가을이었을거야.
난 지금도 그들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를 속이려고 했다는 걸 안단다.
어제도 증명이 되었지.
너의 병이 깊다는 걸. 그래서 수리비가 많이 든다는 걸.
난 고민을 했단다.
너를 계속 곁에 둘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포기를 하고 너의 끝나가는 수명을 지켜 볼 것인가?
어제야 알게 된 거지만 넌 그다지 깊은 병이 아니었어.
미안해.
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너의 엔진이 탁해질때까지 너를 혹사 시켰고 또 깊은 병이라 여겨서 계속 고민만 했단다.
너는 드디어 시위를 했지.
차문 유리를 반쯤밖에 열어 주지 않더구나.
고속도로를 타려고 표를 뽑을 때 난 안전띠를 풀고 차를 정지시킨 뒤 표를 뽑았지.
그것이 본격적인 시위라고 난 왜 생각을 못했을까?
유리문을 고쳐줬을 때 넌 상냥하게 유리문을 내려 줬단다.
우리 관계도 예전처럼 회복되는가 싶었지.
내가 허리가 아파서 치료를 받을 때도 너는 주차장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려 줬지.
또 내가 외국 여행을 갔을 때도 며칠동안 넌 골목길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나를 기다려 줬고.
그 날,
외로웠으면 차라리 몸으로 보여주지 그랬어?
시동을 걸어 주지 않는다던가 하는거 말야.
전에도 두 번 쯤 넌 시동을 걸지 않아서 나를 당황하게 한 적이 있었잖아.
그 때 난 이미 너의 그 슬픔을 보았어야 했는데...
난 아파서 가기 싫어하는 너를 끌고 출근을 하러 나서고 말았지.
아픈 네게 눈이 온 길은 더 가고 싶지 않았을 거야.
넌 미끄저져 벽을 들이 박고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멈춰 섰지.
2차선 가운데 멈춰서서 난 뒤 이어 오던 차가 내 등을 밟고 지나가는 상상을 했단다.
그나마 다행이었지. 뒷차가 쫒아오지 않아서.
너의 범퍼는 다 떨어져 도로를 뒹굴고 어둠을 비춰주던 두 눈도 다 빠져 버리고...
이가 몽땅 빠진 할머니같은 너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단다.
공업사에 가서 너를 어찌 살려볼까 했는데 너와의 인연은 다 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전쟁터에서 심하게 다친 동료에게 총을 쏘듯이 네게 총을 겨눴지만
너를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있더구나.
오늘 내 친구가 너를 보러 갔었단다.
너는 이미 틀니를 새로 끼고 새 단장을 하고 있더란다.
내가 머리를 쥐어 뜯은 건 내 머리가 아파서만은 아니란다.
너와의 이별, 그리고 배신, 연민 뭐 그런 것들이 스쳐 지나가더구나.
하지만
씨에로, 안녕.
네가 달려가 내게 사람과의 끈을 이어주었듯 다른 사람의 끈을 또 이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