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의 극치
게으름의 극치 | |
번호 : 2982 글쓴이 : 김삿갓 |
조회 : 183 스크랩 : 0 날짜 : 2005.09.03 23:17 |
아, 지가 그간 4달 반만의 공백을 깨고-뭔 연예인? 공백을 깨게. -하여튼 직장으로 컴백 했슴다. 4달 반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준 현상은 우선 외적으로는 배에 충격 흡수용 튜브를 보기 좋게 찬 것 하구요. 내적으로는 무쟈게 게을러졌다는 것.
이 튜브 살을 어찌 바람 뺄까나? 그려. 소식이 최고지. 소식에 자전거 타기. 땀 흘리면 지가 안 빠지고 배길겨? 그리하여 보통때 밥의 1/3을 덜 담으려니 약간 미련이 남아 몇 알을 더 담는 위안을 삼고. 역시, 소식하니 몸이 가뿐해서 좋아. 소화가 잘 되니 뱃속에서 난리를 피지도 않구 말야.
근데 여기까정은 좋았다. 퇴근 무렵이 되면 배가 고프다 못해 약간은 짜증스러움이 들면서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 입기가 무섭게 냉장고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는 밥상에 주욱 반찬을 늘어 놓는다. 뭐 새로 지지고 볶고 끓이고 할 시간이 없다. 그래도 철저히 지키는 건 소식! 요구르트를 끝으로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는 자전거를 타러 출발.
여기까지도 좋았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씻고 좀 쉬다 보면 밤중. 이미 설거지 할 의욕은 사라져 버린다는 거다. 매일 이런 똑같은 일이 반복하다 보니 늘어나는 것은 씽크대에 쌓여가는 설거지들. 아니, 출근 첫날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이틀 설거지가 밀린데다가 전에 끓여 뒀던 익모초를 먹으려고 냉장고를 뒤져보니 시커먼 그 물이 보이지 않는다. 아뿔싸, 가스레인지 위에 그냥 뒀구나. 뚜껑을 열어 보니 너댓시간 달인 익모초 물에 곰팡이가 마치 수련처럼 동동 떠 있다. 그걸 쏟아 내고 나니 설거지 그릇 추가요.
내일은 토요일인데뭐. 내일 대청소하지 뭐. 또 미루고 결국은 토요일인 오늘에 이르렀는데 오늘도 귀가를 하며 배고픔에 이것저것 점심 메뉴를 떠올려 보다가 카레밥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런, 급기야는 밥을 할 수 없는 허기에 다시 냉장고에 있는 끼니가 될만한 것들을 죄다 꺼내 놓는다. 하기야 아침도 멀건 호박죽 한 그릇 먹고 가지 않았던가. 호박죽, 냉동해 둔 옥수수, 요구르트, 거기다가 조금 남았던 반찬까지 싹싹 비우고 나니 휴, 내 방이 제대로 보인다. 허나, 씽크대는 포화상태를 달리고 있다. "한다니깐. 설거지 한다구." 누가 물어 봤냐구? 포만감 뒤에 오는 그 나른함. 쿠션에 등을 한참 붙이고 리모콘으로 이리저리 돌리다가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전쟁에 참가하는 군사처럼 앞치마를 동여매며.
음악 소리를 높이고, 퐁퐁과 찌든때 빼는 세제를 섞어 문지르고, 헹구고, 엎어놓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음식쓰레기를 묻으러 텃밭에 가서 고구마 줄거리를 좀 따 오고 저녁 먹을 쌀을 씻어 놓는 것으로 씽크대 앞에서 해방.
씽크대랑 방이 훨씬 넓어 보인다. 세탁기가 빨래 다 했다고 노래를 부른다. 벌써 저녁 때,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려다가 세탁기의 빨래들이 더 구겨질 듯 하여 빨래를 우선 널고, 밥짓기 시작. 카레는 이미 물건너 가고 양배추를 쪄서 된장을 발라 쌈을 싸 먹자. 양배추를 찐 끓는 물에 고구마 줄거리를 삶고... 일은 여기서 부터 커진거다. 삶은 고구마 줄거리를 볶다보니 새우젓을 넣어 애 호박도 볶고 자반 고등어도 굽고 어제 길가에서 뜯어온 깻잎도 씻고 씨가 떨어져 지 스스로 태어난 치커리 따온 걸 씻고 이른 놈은 벌써 먹을만한 쪽파 몇 줄기를 뜯어다가 된장에 송송 썰어 넣고 잘라온 부추에 당근, 양파를 채 썰어 들기름과 볶다가 계란을 깨서 볶아주고... 하여튼 진수 성찬이 되었다. 그려, 이것이 제대로 된 밥상이지. 배고픔에 쫒겨서 먹는 건 좀 슬픈 일이지. 밥위에 찐 고구마까지 먹으니 이 포만감.(역시 소식했음)
그러나!!! 다시 씽크대에 가득찬 설거지들,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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