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납치하다
강원도 동해에 사는 아는 언니를 만나러 갔다가 일을 보고 간 김에 쑥이나 뜯자며 시장바구니를 들고 혼자 산길로 접어 들었다.
가죽 잠바를 입은 탓에 옷이 긁힐까봐 길 언저리 것들만 뜯었다.
취나물, 쑥, 돗나물, 고사리 거기에 두릅까지...
골짜리 물이 흐르는 곳에서 두릅을 따고 있는데 빨간 츄리닝 옷을 입은 남자가 돌다리를 건너 길을 간다.
나도 여러 가지 나물에 젓가락 다섯번씩만 가면 한끼 식사에 충분할 것 같아 두릅 다섯개를 끝으로 길을 걸어가는데
이 남자 가던 길을 되돌아 와서 내게 묻는다.
그 골짜기에서 오는 길이냐고.
난 그냥 입새에서 두릅을 좀 땄을 뿐이라며 시장바구니를 열어 보였다.
그 남자는 그 골짜기로 넘어 가려고 한다나.
나는 거긴 길이 없다고 했고 남자는 내게 차를 가져 왔냐고 물었다.
자긴 초록봉으로 해서 빙 돌아 왔는데 다시 넘어가려니 배가 고파서 차를 좀 얻어 탔으면 좋겠다고.
나도 어자피 가려던 참이어서 그러마고 했다.
그리고 난 친구를 좀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남으니 무릉계곡을 갈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갈 생각 있냐고 하니깐 자긴 배가 고파서 못 간댄다.
나물도 뜯었으니 어디 고추장 한 숟갈과 공기밥만 있음 딱인데 하면서 그럼 밥은 내가 살테니 가겠냐고 하니까 이 남자 그러마고 했다.
(사실 거긴 분교도 폐교가 됐을 정도로 오지에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안 태워준다면 오던길을 되돌아 봉우리를 넘어 서너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판이다. )
차 가까이 와서 등산화에 묻은 흙을 다리 난간에 대고 털었더니 이 남자 신발을 세우라며
가지고 있던 나무 지팡이로 신고 있는 등산화 바닥을 내리 쳐서 흙을 떨군다.
남자가 옆에 타는 걸 보면서
"이거, 남자 이렇게 태워도 되나?......" 했더니
이 남자 오히려 자기가 납치 당하는 거 같다고 한다.
차를 타고 무릉계곡 입구로 향하며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했더니 아무개라고 하며 무슨 은행에 다닌다고 한다.
나도 이름과 직업을 대 주었다.
나물 뜯은 바구니를 같이 들여 다 본 지 겨우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을 때였다.
차를 몰아 무릉계곡 입구로 향하니 입장료는 자기가 내겠다나. 혹시라도 싶어 차비 3천원은 들고 왔다며.
동해 시민이라며 천원짜리 한장만 내밀고 통과.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산 밑의 뻔한 산채 비빔밥일 거 같아
납치 당하는 김에 완전히 스릴을 느껴보라며 차를 돌렸더니 이 남자 아주 황당해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오던 길을 되짚어 전에 가 보았던 두부전골집엘 갔다.
만난 지 이십여분밖에 지나지 않은 이 희안안 두 사람은 두부 전골을 끓여가며 그 국물에 숟가락을 서로 담궈가며 밥을 먹었다.
아주 오래된 친구인양 남은 밥을 덜어 주기까지 하면서.
이 남자도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얼떨결에 끌려(?)와 밥까지 마주앉아 먹는다며 웃는다.
"어제 무슨 꿈 꿨어요? 혹시 북쪽에서 귀인이 나타난다는 그런 꿈?"
했더니
"그 꿈은 그쪽에서 꿨을 것 같은데요."
한다.
밥을 다 먹고는 야생화 몇 편을 찍고 무릉계곡과 시내로 가는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거냐니깐 무릉계곡으로 가자고 한다.
몇 년 전. 산을 힘겹게 올라 모퉁이를 도니까 무릉도원(?)처럼 보라색 모란꽃이 절을 온통 감싼 그 감동이 남아 있는-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신축한 절만 어색하게 들어 앉은-관음사로 코스를 정했다.
산을 가겠다고 애초에 나선 것이 아니라서 가죽옷은 등산을 하기엔 너무 더웠다.
옷을 바위 밑 어디에 숨겨 두고 가자고 하니까 남자는 자기가 들고 가겠다며 옷을 받아 든다.
그 주머니 안에 지갑, 휴대폰, 차 열쇠가 들어 있었다.
"지갑은 줘요. 이번엔 내가 납치 당하는 거 같네."
했더니 남자 지갑을 건네주고 두툼한 내 휴대폰은 츄리닝 주머니에 넣는다.
(이건 무슨 버섯일까요? 참나무에서 땄다는데.)
헉헉헉, 재잘재잘
끊임없는 수다와 경치 보기.
남자는 매표소부터 관음암까지 왕복 30분 코스로 끊는다며 체력 테스트 구간이라고 한다.
남자는 폭포를 가리키며
"저기가 겉에서 보면 다 보일 것 같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하나도 안 보여요. 샤워하고 내려 가기에 딱이죠."
한다.
경치가 쥑이는 곳, 샤워하기 좋은 곳 등 소개하며 계속 앞장서 간다.
관음암에 도착하여 물을 먹는데
"어제 뭐 페인트 칠했어요?"
하길래
"아뇨."
라고 대답했더니 머리에 페인트가 묻었다며 내 긴 머리를 만진다.
그 남자가 만진 건
아~~~
허연색 새똥이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만난지 얼마 안 돼서 통성명하고 점심을 같이 먹더니 이젠 칠칠맞게 새똥이나 맞고 다니는 여자.
그 넓고 넓은 좋은 경관 다 놔두고 하필이면 어떤 새놈이 내 머리에 조준을 했단 말인가.
하도 어이없고 웃겨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치며 웃었다.
그래도 처음 보는 남자한테 고추가루 낀 이빨 드러내며 웃지 않으려고 밥을 먹고나서 살짝 거울까지 보는 센스를 가졌었건만.
하산을 하여 이 남자는 차 안에서 단단한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내게 선물로 주겠다고 했고 나는 싫다고 했다.
내가 짙은 분홍색 복사꽃을 보고 감탄을 하자 남자는 선물이라며 그걸 꺾어 주었다.
남자는 내 휴대폰에 자기 휴대폰 번호를 찍어줬다.
그리고 그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 지금 어떤 여자한테 납치 당해서 끌려가고 있는 중이야... 여긴 어디고. 지금 그 여자 차 안이야... 바꿔줘 볼까? 응, 거기로 갈게. "
직장 동료인듯했다. 산을 같이 넘기로 했으나 술을 많이 마셔서 혼자 등산하는 길이었다고 했었다.
그 남자의 차가 있는 곳까지 태워다 줬는데 서울로 출발하기엔 차가 밀릴 것 같은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그 남자는 장호라는 경치 좋은 곳을 추천해 주었고 나는 좀 더 있다 갈 요량으로 거길 가 보자고 했다.
이번엔 그 직장 동료라는 남자가 자기 차에 시동을 걸면서 자기도 지금 얼떨떨하다고 한다.
이번엔 거꾸로 두 남자한테 내가 납치 당해 가는 게 아니냐니깐 웃는다.
우리 셋은 장호 바다를 바람 맞으며 잠깐 걸었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와서 길다방 커피(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은뒤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