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을 찾아서
잘 나가는 직장인은 계획적이고 융통성 있고 남성적이며 외향적인 직장인이라고 하는 조사결과가 있더만
난 계획성 없고 융통성 없고 여성적이며 내성적인 직장인이다.
특히 계획성이 없는 건 약속을 미리 정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터.
출근을 해서 창문을 열면서 내다본 경치가 (울 직장은 산꼭대기) 연둣빛 이파리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역시 계획에도 없는 긴급번개를 쳤다.
고등학교때도 시험기간에 도서관 간다고 도시락까지 챙겼다가 대문을 나서면서 본 하늘이 너무 이뻐서
도서관이 아닌 저수지에서 도시락을 까 먹고 왔으니
그 때 도서관으로 갔다면 난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오를 때마다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 같은 연주봉 옹성은 몸을 낮춰야 하는 암문(아그네스님은 빼고)을 지나
하늘과 맞닿는 곳으로 넘어간다.
만리장성에도 가 보았지만 뭐 남한산성이나 다를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은
시원스레 아래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의 N 타워가 보이고 중부,외곽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궤도따라 차들이 내달려 가고
높은 곳에 올라 이 많은 집들 중에 내 집이 없다는 게 쓸쓸해지기도 했었는데
이젠 시골집도 하나 있고.
최근 알게 된 모씨는 저 빌딩 숲 어디쯤에선가 미간을 찡그려가며 일에 열중일 것이다.
그래, 이걸 보러 온 것이었다.
짐승 잔등의 잔털처럼 잎을 다 떨구고 서 있는 겨울나무들은
이제 연둣빛으로 갈아 입기 시작하고
산등성이를 향해 치달아가며 털을 키우고 있었다.
여기저기 뭉턱뭉턱 벚꽃이 피고, 성질 급한 떡갈나무는 이파리를 손바닥반만하게 키워냈다.
층층나무의 이파리 색깔을 보는 것만으로도 긴급번개가 만족하다면 내가 너무 소시민적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다음주면 꽃잎이 다 떨어질거라며 올림픽 공원으로 가는 이지님은 꼴랑 2키로의 걸음질이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