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라님 보시오
댁이 잘 키운 아들 하나, 열 파출부 안 부럽다캤소?
내가 거기 홀라당 넘어가 자청하여 조카의 아이를 보지 않았겠수.
조카가 잔뜩 부푼 배를 안고는 첫째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데
출산을 하면 그 첫째놈을 봐줄 사람이 없다는구랴.
아이를 봐준다는 데는 아주 먼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구만.
그려. 조카의 아이(내게는 손자?ㅎㅎㅎ) 부터 꺼내면 머리가 복잡하겠구만. 정리를 해 주지.
이거 집안 얘기 전부 끄들려 나와야 하는데...
내겐 띠동갑인 언니가 있다우.
그 언닌 국민핵교밖에 못 나왔어.
왜냐구?
나랑 내 동생 봐 주느라 밥벅듯(아니 그땐 보리밥 먹듯) 학교를 빠져서 그나마 국민핵교도 겨우겨우 졸업했다누만.
그란디 그 언니가 맘 쓰는 건 태평양 바다와 같은데
돈복은 사발종지야.
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언니의 딸년.
내게는 조카지. 그년은 (어이구 여기서 욕이 나오네~) 즈그 어머니 사정이 그런데도 산후조리를 해 달라는 거여.
물론 지는 산후 조리원에 가 있겠지만서두 첫째놈을 봐 달라는 거지.
나두 그 언니를 무척 따랐었지. 21살에 시집을 갔는데 토요일이면 버스정류장에서 밤이 되도록 그 언니를 기다렸거든.
토요일이면 어디 먼데 갔던 사람도 다 돌아 오잖아. 아마 어린마음에 그런 심정이었었나벼.
참, 언니가 선보러 밤에 이웃집으로 갔을 때도 나는 영영 안 오는 줄 알고 울다 지쳐 흐느끼며 잠들었던 것도 기억나.
아마 아홉살 때였었던가봐.
내 종아리가 좀 휘어졌거든.
아무래도 큰언니가 업어 키워서 그런가벼.
그런데 말이지.
방학이 되자마자 연수를 마치고 어디 여행이나 갈까 하고 궁리하고 있던차에
조카가 풍선보다 더 부푼 배를 안고 있는 거야.
큰언니는 이십여 일 일을 쉬면 일자리는 떨어질거라 걱정만 하고 있고.
그랴.
내가 봐주마. 언니한테 받은 거 언니 딸년한테 갚지 뭐.
내가 최근에 좀 살이 많이 빠졌거든. 쇄골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큰언니와 조카는 그 몸으로 애를 봐줄 수 있냐고 걱정하면서도 미안해 했지.
"밭을 맬래? 애를 볼래"하면 다들 차라리 밭을 맨다지만
"나 애 보는 거 좋아해. 애들을 내가 얼마나 잘 꼬신다구."
이래서 조카의 애를 보게 되었다는 말쌈.
아침부터의 생활을 열거하자면
우선 조카의 아이(5살배기)가 깨서 일단 자기 엄마를 찾아.
태어나서 즈 엄마를 처음 떨어져 봤거든.
1순위인 엄마가 없다는 걸 알지. 그럼 2순위 즈 아빠한테 붙어.
그런데 즈 아빠는 지만 끼고 살 수 있남? 출근을 해야지.
살짝 가버리고 나면 3순위 외할머니한테 붙어.
외할머니(내겐 큰언니)도 밤 12시까지 일하고 와서 잠이 모자라 헤매다가 8시 반이 되면 또 출근하거든.
캬캬캬. 이제 4순위의 존재가 역할을 해야할 때.
4순위인 나는 녀석의 밥을 먹이고
안 간다고 하는 놀이방에 보내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완전 체험 삶의 현장,전업주부 편이야.
그러다보면 2시 55분. 조카 손주야, 손주 조카야? 하여튼 고 녀석 마중가라는 알람이 울리거든.
슬리퍼 끌고 마중 나가면 녀석이 데면데면한 얼굴로 내게 와서 안기네.
4순위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거겠지.
요녀석과 물놀이, 책 읽어주기, 시장에 가기, 뭐 이런 일들을 하는데
녀석이 청소를 하겠대.
플로라의 열 파출부가 떠오르대.
걸레를 적셔와 찍찍이 부분을 밀대에 붙여서는 밀고 다니는데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더구만.
이런 날도 있었어.
녀석이 놀이방에 가서는 아주 잘 논다는데
그리고 즈그 엄마 떨어지기 전에는 놀이방에 잘 갔다는데
심통으로 포크레인을 사 달라는 거야.
태워달라기도 하고 말야.
녀석을 업고는(떼가 늘었지?) 포크레인, 지게차, 덤프트럭, 사다리차... 이런 차가 세워진 곳에 부탁해서 녀석을 운전석에 앉혀주기도 했지.
그래도 즈 엄마가 약속에 관한 교육은 잘 시켰더만.
포크레인 사달라고 떼쓰는 걸 이틀만 기다리면 경비실에 와 있을 거라니까 그날은 놀이방에 잘 갔지.
놀이방 차에서 내리자마자 경비실에 가서 찾아 왔어.
그날도 녀석이 포크레인 바가지에 모래 퍼 담는 놀이를 하는 걸 땡볕에서 지켜 보다가 돌아왔지. 헥헥
내가 4순위에서 3.5순위 정도로 가까와 질 때쯤이 녀석과 이별을 해야할 때였지. 2주쯤 시간이 흐른 뒤였지.
즈그 아빠가 아들한테 가르치더군.
"윤하야, 집에서는 이모할머니, 그렇게 부르고 밖에 나가서는 이모, 이렇게 불러야돼. 알았지?"
조카 사위도 민망했던가벼.
10년도 차이가 안나는데 즈그들은 애가 둘인데, 난 손주 조카를 보고 있다 생각하니 말여.
동네 좀 큰 마트엘 갔는데
물건이 쌓아져 칸칸이가 돼서 녀석은 내가 순식간에 안 보였나벼.
"이모 할머니." 울면서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녀석, 거 봐라. 니가 4순위라고 니 편할 때만 나한테 오더니 내가 절실히 필요하냐?
이런 유치한 생각을 갖고는 좀 있다가 나타났더니
녀석 반가워서 어쩔줄 몰라하데. ㅎㅎㅎ
그날 점심때 녀석이 놀이방에서 돌아오기 전에 큰언니는 점심을 사줬어.
애 봐주느라 고생했다고.
점심은 조카가 사줘야 하는데 왜 언니가 사주냐니깐
애 봐서 자기가 일을 할 수 있었다나?
저녁때가 되니 이번엔 조카 사위가 저녁을 사겠데.
밥 한끼 먹는 걸로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다면 그러지 뭐.
조카사위랑, 조카 손주랑 셋이서 저녁을 먹고는 늦게 성남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참 묘하더구만.
그래서 44일 방학동안 내게 오롯이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하루, 이틀동안은 녀석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려서...
난 이런데, 녀석은 4순위는 생각도 안 나겠지?
(이 글 쓰는 걸 막 마치고 조카한테 전화해서 녀석을 바꿔 달랬더니 바쁘다며 받지도 않네. 차라리 밭을 맬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