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성북동 놀러가기

햇살가득한 2010. 5. 23. 12:25

세상 보는 눈이 참한 김선생과 성북동에 놀러 가기로 했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했다는데 내가 그녀의 미술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병실에 있을 때 깜찍한 노란 수선화를 사 들고 온 거 하며 책 포장과 메모 한 것을 보고는

한 감각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선생을 기다리는 동안 사진도 찍고

 

 

 

정자에 앉아 책도 보고 요플레도 사 먹었다.

 

일정은 그녀가 짰다. 

 

 

혜화문을 둘러 보고

장승업 집이 있던 자리에서 옮겨온 기념 표석도 보고

최순우 옛집을 들른다.

 

십여 년 전, 국어 선생님이 책읽는 취향이 나랑 비슷해 자청해서 내게 빌려 주었던 책 가운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영주 부석사의 배흘림 기둥을 묘사한 것이었는데 그 후로 부석사의 그 기둥을 안아보기도 했었다. 

그 책을 쓴 최순우(1916~1984) 선생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평생 박물관에 근무했고 많은 미술 평론과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있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한때 성북동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걸 시민성금을 모아 매입하여 현재 자원활동으로 지켜지고 있다.

뒷뜰에는 이처럼 한가롭게 툇마루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한가롭게 앉아 이야길 나누거나    

 

어린이들은 색칠을 하거나

차를 마신다.  

 

장독대도 옛집의 정겨움을 더해 주고 있다.

 

 

1년에 두 번 그것도 2주 동안만 개방한다는 간송미술관에 들렀다.

그녀는 유럽 여행을 미술관을 깃점으로 그 주변을 도는 여행을 하기도 한다는데

이번에도 주 목적은 미술관 관람이었다. 거기에 비해 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림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길상사에 들렀다.

 

부처님 오신 날 다음 날인데도 사람들이 북적댔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지은 절로

백석의 여인 김영한이 터를 시주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롭게'에 감동하여 땅을 시주하겠다고 했는데 법정 스님은 거절하기를 10년을 하다가

받아들여 절을 지었다고 한다.   

 

나중에 찾아 본 자료.(퍼온 글)

 

김영한 (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筆名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고 전한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 있고,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폐암으로 몰아넣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 원의 현금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리고 '내 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비평)을 출간했다.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삶이란 ~ 그저 그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우리의 삶은 그저 스쳐 가는 바람이라는 것 ~~~~~
그 김 여사 子夜는 吉祥寺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길상사 내의 김영한(법명 吉祥華) 기념비>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 우리 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가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 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있기 간절히 바랐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고 한다.

 

白石(본명 백기행 1912∼199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같았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 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저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子夜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백석은 어느 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詩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야의 회고)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년, 여성)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또한 애절하게 나타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은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남겨지고
북한에서 자야보다 먼저 죽었다.

그의 시(詩)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많은 독자의 숨결이 되어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의 시 중..)

 

 

 

길상사에서 내려오는 길. 

시멘트 담 틈에서 웃고 있는 고들빼기 꽃을 보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기거하던 심우장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었다는 심우장은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이다. 

아, 단촐한 집. 나도  최소한의 살림살이로 단촐하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골목을 따라 내려 오는 길,

재개발로 헐릴 위기는 넘겼지만 공원화 한다니 언젠가는 이사를 가야 할 이 집은

 

떨어져 나간 벽을  미술 학도를 꿈꾼 어떤 젊은이의 4B 연필의 흔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비가 온다.

우산 준비를 안 해 간 내게 이기적인 우산을 가져 왔다고 하는 김선생과 머리만을 디민 채 막걸리 집을 찾는다.

막걸리집은 못찾고

한옥에서 안채는 치과 진료를 하고 사랑채는 까페를 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거나 이를 치료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마당에서 땀을 흘리며 뛰어 다닌다.

 

 

 

막걸리 대신 그녀는 맥주를, 나는 대추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늦은 시간에 천안까지 가야 할 그녀에게 저녁을 안 사 먹이고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