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매실나무: 쑥쑥 커서 나도 내년엔 열매를 맺을거야.
호박덩굴: 글쎄, 가능할까? 내가 이렇게 네 목을 쥐고 있는데?
매실나무: 넌 서리만 오면 끝장이잖아.
호박덩굴: 그런 너도 가을이 깊어지면 잎이 지고 말 걸.
매실나무: 그래도 난 가지는 살아 있지. 네가 잡지 않았다면 곧게 자라서 좀 더 하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아주까리: 할머니, 저 그냥 이대로 누워서 살게 내버려 두랬잖아요. 잎들도 이제 하늘 보는 자세를 잡았는데... 키가 컸을 때는 땅콩이랑 고구마가 햇빛을 가린다고 해서 제가 얼마나 미안했는데요. 그래서 태풍이 불어 오길래 그냥 누워 버린 거라구요. 할머니가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다리 부러졌어요. 엉엉. 저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요. 새끼들도 아직 여물지 못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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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배추들: 우리 이제 이 좁은 집에서 이사 가는 거예요? 사실 다리도 제대로 못 뻗어서 돌돌 말면서 자라고 있었거든요. 새 집으로 이사 가면 다리 쭉 펴고 살 수 있는 거죠?
디디: 그으럼. 풀들이 괴롭히지 않게 비닐도 씌워 줄게. 잘 자라야 한다.
디디: 목마르지? 자, 시원한 물 마시고 쑥쑥 자라렴.
아기배추1: 목이 조금 마르긴 해도 참을 수 있어요. 좀 있으면 비 올텐데요. 뭘.
디디: 비가 온다고? 하늘을 봐라. 이렇게 햇빛 쨍쨍인데. 아기 배추들 이파리가 다 시들어 가네. 휴, 덥다. 빨리 일 끝내고 계곡에서 맥주 한 캔 따야지.
디디 빈 페트병을 들고 계곡까지 가서 물을 떠 날라 배추 모종에 주기를 반복한다.
아기배추2: 에고 에고. 디디님, 고생 많네요. 조금 있으면 비 와서 헛수고가 될텐데.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거 안 보이세요? 저기 지렁이도 땅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는데요.
고추잠자리: 냅둬라. 아기배추. 인간들은 자연을 안 믿어. 안 믿을 뿐이겠냐? 아예 무시까지 하면서 막 대하는 걸. 요 아래 모퉁이 돌아서 산 깎은 거 이번 태풍에 산사태 났잖냐. 포크레인으로 그렇게 산을 파 내리더만. 나도 비 오면 쉬려고 잎 넓은 토란잎 봐 두고 왔단다.
디디: 햐, 폭신폭신한 흙침대에 누우니 좋네. 하늘에 구름은 한 보따리, 내가 만든 구름 과자도 한 덩어리.
지렁이: 두더쥐도 아닌 것이 네 발 달린 고라니도 아닌 것이 가뜩이나 비닐을 씌워서 답답하고 더운데 나를 누르는 자는 누구야?
달개비: 누구긴 누구겠니? 땅속에 사는 너희같은 지렁이, 두더쥐, 땅강아지, 굼벵이들이 숨막히고 더워서 이사가게 만드는 인간들이지. 얘네들은 작물만 잘 되면 비닐멀칭은 기본이요. 비료에 농약에... 다행히 박씨 아저씨가 농약을 뿌리지 않은 덕분에 나도 밭에서 이렇게 살고 있지만 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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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달맞이꽃: (하품을 하며) 아함, 졸려. 이제 아침이 되었으니 자야겠다. 어제 달개비꽃이 무슨 말을 했더라.
달개비꽃: 대답 한 번 빠르군. 어제 저녁 때 한 얘기거든.
달맞이꽃: 너도 알잖니. 초저녁부터 노래하는 베짱이, 귀뚜라미들에게 노란 드레스 차려입고 같이 놀아 줘야 한다는 걸.
달개비꽃: 달맞이꽃. 너는 좋겠어. 뿌리가 깊게 박혀서 잘 안 뽑히니 말야.
달맞이꽃: 야야, 말도 마. 우리도 아기일 때는 얼마나 여리디 여리다고. 나도 자라면서 몇번이나 김 맬 때 뽑혀질 뻔 했어. 햇살의 장갑 낀 손이 다가 올 때는 숨 소리 조차 내지 못했다구. 어쩌다가 오는 주말농장이라 게으른 인간들이 내겐 생명의 은인이지 뭐. 딴 나라에서 오느라고 힘들었는데 이 땅에서 뿌리 내리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 농약 안 뿌린 농지가 거의 없는 통에 말야.
날개: 부지런들 하세요. 어제 그 너저분하던 옥수수를 다 뽑아서 이렇게 정리했단 말이예요?
날개남편: 당신, 잘 잤어? 햇살 어머니가 아주 일을 잘 하시네. 당신 세 몫은 하실거야. 부지런하시구 말야.
햇살: 우리 엄마 새벽 세 시면 일어 나세요.
햇살엄마: 아이구야, 배고프다.
햇살: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은 접니다. 저는 그럼 흙 안 묻히고 들어 갑니다.
햇살 여린 호박잎을 뜯으며 집으로 향한다. 호박잎, 애호박 모두 긴장하는 가운데 호박꽃 태연히 벌을 불러 들이고 있다.
햇살: 호박잎 미안. 너희들은 오늘 찜통에 쪄져서 아침 밥상에 오를거야. 주말 농장의 낙이 뭐겠니. 얼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살다가 하루 쯤 이런 곳에 와서 직접 키운 야채로 밥상을 차려 먹는 거지. 너희들의 희생이 도시 사람들에겐 위안이 되기도 한단다.
애호박: 싫어요. 난 죽기 싫어요. 아직 씨앗 주머니도 만들지 못했단 말이예요. 우리 엄마처럼 나도 하얀 분이 뽀얗게 나는 잘 여문 호박이 돼서 씨앗을 내고 가족들을 만들 거라구요.
햇살: 알았다. 알았어. 다음주에는 너희들 보러 못 올거야.
햇살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들른 곳은 집 아래 있는 작은 개울. 세수를 하고 발을 씻던 햇살은 신발을 벗어 작은 여울목으로 던진다.
송사리: 어~ 신발배다. 작은 돌멩이도 하나 태우지?
시냇물: 햇살이 열 살 때 하고 놀던 신발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네.
송사리: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시냇물: 좀 얘기가 긴데. 난 구름으로 떠돌다가 비가 되어 떡갈나무 몸 속으로 들어갔지. 그러다가 이파리에서 나와 다시 구름이 되었지. 햇살이 열 살 되던 여름 장마비에 햇살이 고무신을 던지며 놀다가 신발을 잃어 버렸는데 내가 쓸어가 버렸거든.
햇살: 정말? 햐, 이거 얼마만이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얼치기 도시 텃밭 농사꾼들 따뜻한 밥 지어 된장찌개에 밥 그릇들을 다 비우고 다시 밭으로 향한다.
햇살엄마: 무씨는 소독한 거라 색깔이 있어서 씨 뿌리기가 좋지. 이렇게 뿌리고 손으로 덮으면 돼.
알타리무씨1: 아, 이 흙냄새. 소독약 냄새는 이제 싫어. 난 물을 마셔 통통하게 불어서 껍질을 터뜨릴거야. 껍질을 터뜨리지 않는 자는 크게 자랄 수 없거든.
알타리무씨2: 햇살 어머니, 우리 사이 좀 넓게 넓게 뿌려 주세요. 이제 곧 가을 바람이 불거예요. 시원한 바람이 포기 사이로 불게요.
햇살엄마: 이 정도 간격으로 뿌려야 먼저 큰 놈은 솎아 먹지.
햇살이 풀을 헤치며 들깨밭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들깨잎들 긴장한다.
들깻잎1: 어째요. 우리를 심어 놓고 김을 안 매줘서 우리가 양분을 풀들한테 다 뺏겼어요 씨앗도 못 내게 생겼는데 이파리까지 뜯어 가겠다고요?
햇살: 알았다. 알았어. 엄살은. 한 대궁에서 한 개 씩만 뜯어 갈게.
들깻잎2: 휴, 다행이다. 방아깨비가 먹은 나는 안 뜯어 가겠지?
햇살이 들깨밭에서 토란밭으로 옮겨가자 토란잎들 큰 키와 넓은 잎을 작게 오므리며
토란: 아직 우린 다 안 자라서 쓸모가 없죠?
햇살: 그래. 너희들은 추석 때를 기다려. 토란탕을 해야거든. 그런데 지난 곤파스 태풍이 심하긴 심했나 보네. 이파리가 다 찢어졌잖아.
아기토란잎: 나는요. 엄마, 아빠 그늘에 숨어서 이렇게 빗물을 모아서 굴리며 놀아요. 심술쟁이 바람이 나를 흔들어 놀잇감을 빼앗아 가지만 뭐, 뿌리한테로 보내니까 다시 내게로 와 내 몸통을 살찌우죠.
햇살가득한 이번엔 아주까리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주까리: 햇살님 고마워요. 어제 부러졌는데 아직 이파리가 싱싱한 걸 보면 깁스가 제대로 되었나 봐요. 그동안 정성껏 키우던 내 새끼들을 잘 키워서 내년에 더 많이 뿌려지는게 보답하는 길이겠죠?
햇살: 그래. 넌 이 밭에서 하나 뿐인 소중한 존재잖아.
얼치기 농사꾼들, 오전의 할 일을 오후로 미루고 시냇물로 간다.
날개: 아, 시원하다.
시냇물: 고생하셨어요. 아예 온몸을 저한테 맡기세요. 옷이야 해가 말려 줄테니까요.
구름: 야, 시냇물. 무슨 해야 해는. 내 몸이 무거워졌거든. 너희들 있는 쪽으로 내려갈게. 내 친구, 가족. 하여튼 무리지어 갈 거거든. 제 자리에서 살겠다는 흙과 돌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어쩌겠니. 서로 마음 가라앉히고 맑게 흘러 가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