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제에게
참 오랫만에 널 다시 만나는구나. 얼마나 오래 되었으면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
요즘 머릿속에 맴도는 동화가 있는데 네가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공공 도서관에서 너를 빌렸단다.
그런데 말야. 이런 말 있잖니? "우물물에 침 뱉지 말라"는 말. 자기는 이미 마셨으니 다시는 안 마시게 될 거라며 침 뱉지만 언젠가는 다시 마시게 된다는 말이지. 내가 오늘 그 말이 떠오르더라구. 공공 도서관의 책을 빌려 읽으면서 코딱지를 후벼 파서는 책에 발라 놓는 놈. 아, 정말 역겨워서. 겨우 그 장을 건너 뛰고 읽느라 너의 그 장난기를 하나 놓치고 말았지.
동화책을 재미가 아닌 공부로 읽는 나는 너와 밍기뉴와의 대화, 성장의 통과의례, 글의 짜임, 인과관계 등에 초점을 맞춰 읽는데 자꾸 눈물이 나더라. 이미 눈물 샘이 터져 버렸어. "발가벗은 몸이 나는 좋아"라는 뜻도 모르고 불렀던 그 노래가 실직한 아버지를 위로 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아비를 놀린다는 자격지심으로 들려서 가죽벨트로 얻어 맞은 일.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아버지를 관심 밖으로 두는 거라는 네 말도 의미심장했지. 미움, 분노보다도 더 완벽한 복수는 무관심인것을 말야. "바람둥이"라고 누나를 놀렸다가 형과 누나에게 얻어 맞은 일.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였다고 엄마한테 말할 때, 그리고 포르뚜까에게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으니 망가라치바 기차에 뛰어 들겠다고 한 말은 정말 슬프더라. 나도 어렸을 때 장난 꾸러기여서 언니들한테 미움을 받았거든. 다리밑에서 주워 왔다고 해서 엄마 찾으러 간다고 실제로 다리 밑에 간 적도 있었으니까 말야. 네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 너를 친구와 아들로 여긴 포르뚜까가 사고로 죽었을 때 하늘 나라에 가고 싶어하는 너의 그 넋나간 모습도 충분히 상상이 되더구나.
너와 뽀르뚜까의 우정도 부럽단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을 만날 때 먼저 나이부터 계산하고 서열을 정하잖니. 친구라는 건 나이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닌 거 같아. 나도 아이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지.
라임 오렌지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워 더 이상의 너의 친구가 될 수 없고 너 또한 포르뚜까의 죽음으로 어른이 되어 가는 게 한편으로는 슬프단다. 어른들의 세계가 즐거운 것만은 아니거든. 너는 더 이상 나무와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도랑물을 아마존 강으로 여길 수도 없어. 넌 작든 크든 권력을 잡아야 하고 경제 논리와 경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거야.
내가 안구건조증이 있거든. 특히 책 볼 때는 인공 눈물약을 넣는데 오늘은 오히려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휴지로 연신 눈물 찍어 내느라 옆사람 보기가 민망했단다. 그나마 도서관 자리가 칸막이가 되어 있었으니 망정이지. 왜 집으로 가지 않았냐구? 네가 마지막으로 어른이 돼서 고백하는 부분까지 마저 읽고는 어린이 도서실로 갔어. 사서한테 책이 역겨워서 읽을 수가 없다고 했지. 그 사서는 폐기처분하겠다면서 딱지를 붙이더군. 예약이 되어 있어서 자동 반납처리가 안 될 정도로 인기 있는 너였는데 말야. 그리고 집에 돌아와 너를 주문했단다. 밑줄 긋고 메모하면서 읽어야 할 부분이 많아서.
너를 다시 만나고 이런 생각도 들었단다. 맑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싶은데 그렇게 살기에는 사회 부적응아 같다는 생각 말야. 제제야, 나도 어른인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