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 따라 봄나들이
오지.
주차문제로 아랫층 남자와 싸우면서, 여덟줄 실에 꿴듯 줄줄이 달려가는 차량 행렬 속에서, 들이 아닌 하우스에서 멀쑥하게 자란 돌나물이 마트에 랩으로 싸여진 채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보면서 나는 늘 오지를 꿈꿨다.
내가 그들 부부를 알게 된 건 오지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까페를 통해서였다. 남자는 서울 생활을 하다가 귀농을 하여 경북 영양에서 자리를 잡았고 후에 여자가 그곳으로 들어가 살림을 살게 됐다. ‘해담는 집’이라는 까페 이름처럼 해는 온종일 오목한 골짜기에서 놀면서 그들이 유기농 고추 농사를 짓게 비춰 주었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표고버섯과 땅콩 도 가꿔 주었다.
아이는 프라스틱 장난감보다 아빠랑 다슬기를 잡다가 샛강에서 바지를 적셔오기도 했고 엄마는 다슬기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또 베개에 팔을 넣어 글러브를 만들어 권투를 하는 부자를 보면서 도시의 아빠들이 피곤에 절어 들어오고 일요일이면 밀린 잠을 자느라 아이에게는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으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 도시에서, 농사지으며 여유롭게 사는 그들이 부러워 난 이따금씩 그 먼 거리를 달려가곤 하였다.
풍기 IC 에서도 1시간 반을 더 가야 닿는 곳. 그래서 '육지속의 섬'이라 불리는 곳. 오지로의 발령이 달갑지 만은 않은 공무원 대기 발령자들은 BYC 양말을 신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그 깊은 내륙의 오지를 다니면서, 드러나지 않은 뽀얀 속살 같은 영양의 오지길을 걷기 좋아하는 "나를 찾아 길 떠나는 도보여행" 사람들에게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답사를 나선 것은 1월 1일. 대티골 '치유의 길'이었다. 영양터널이 생기기 전 31번 국도였던 길은 소갈비(소나무 잎)가 떨어져 폭신폭신한 쿠션을 만들어 주었고 양쪽으로 늘어선 소나무 향기는 바람에 얹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1년에 한 번 배달한다는 우체통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자 눈발이 날렸다. 작은 도랑 물이 흘러 얼음이 언 남회령길을 사륜구동차로 조심스레 빠져나오니 펑펑 쏟아지는 눈발에 한티재를 기다시피 넘어 왔다.
다음날엔 일월산 코스를 넣어 볼까 하고 둘이 나섰는데 거의 등산코스라서 빼기로 결정. 이리하여 또 하루가 지나갔다.
또 하루는 서석지에서부터 영양시장까지 14키로의 코스를 걷기로 했다. 영양에 사는 언니, 나, 그리고 바루. 배낭에는 코펠, 버너, 그리고 뜨끈하게 속을 덮혀줄 마른 누룽지가 한 줌 들어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었을까.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는데 통 가게가 보이지 않는다. 가방에는 그 흔한 쵸코파이 하나, 사탕 한 알 없다. 아니 누룽지와 코펠과 버너는 있지만 정작 불을 붙일 라이터가 없다. 시내까지는 아직도 2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 거리여서 마을 회관으로 쓰적쓰적 걸어갔다. 가게가 없으므로 회관 할머니들께 라면 몇 개를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끓여 먹을 거여?”
하시길래
“가다가 적당한 길바닥에서 끓여 먹죠 뭐.”
했더니 불쌍해 보였는지 회관에 들어와 끓여 먹고 가라고 하신다. 거기다가 파 까지 몇 뿌리 뽑아다 주시는 센스. 다음부터는 사탕이라도 꼭 넣고 다녀야겠다.
그러나 이 코스도 제외시켰다. 서낭당이 있는 이 곳은 절벽위로 난 길에 외줄기로 위험하고 가파라서 우리 까페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며칠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우리가 걸어야 할 1박 2일의 코스를 정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다시 답사를 하러 영양으로 갔다. 꼭 외씨버선길은 아니어도 걷기 좋은 길을 넣고자 상원리 임도길을 반나절 걸었으나 주제가 될만한 뭔가가 없었다.
다음날은 왕피천 쪽을 걸었다. 포장된 국도를 걷는 건데 차가 이따금 한 대씩 지나다닐 뿐 좋기는 하나 왕피천 계곡으로는 도보를 할 수가 없고 여름에 백패킹으로 강을 건너며 걷는다면 좋은 길이어서 다음에 걷기로 했다.
그리고 주실마을 걷기. 이 날도 눈이 왔다. 자료사진을 좀 남겨야 하건만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다보니 사진찍기마저도 귀찮다. 더군다나 좀 빠른 길을 걷자고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물을 건너야 해서 더 돌아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4키로를 남겨둔 채 날이 어두워져 히치를 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답사를 하면서 같이 갔던 사람들이 물었다. 왜 이 고생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길을 소개하냐고(우린 깃발이라고 한다.). 내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아름다운 길을 소개해서 나도 고맙게 걸었듯 나도 좋은 길을 소개하는 거라고.
먼 곳으로의 여행이니만치 좀 많이 걷고 아름다운 길을 안내하자. 그래서 대티골 ‘치유의 길’과 ‘일월산 정상쪽에서 돌아가는 길’, ‘남회령 길’ 그리고 ‘주실마을 문학길’을 걷기로 결론을 내렸다.
매월 정기도보가 있는 사월 넷째주말.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봉화를 지나 영양으로 들어섰다. 비가 내린 뒤 더운 날씨가 며칠 이어지더니 나뭇잎들이 경쟁하듯 튀어 나오고 연두색으로 쑥쑥 자란 나무들이 어우러진 산에는 분홍빛 살구꽃과 하얀 돌배꽃이 무더기 무더기 피어 봄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자생화공원에서 걷기를 시작하려 했으나 서울에서 4시간여를 걸려 온 터라 아름다운 숲길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대티골 주차장에서 숲해설가인 달새님의 일월산 이야기를 듣고 도보를 시작한다. 31번 국도로 쓰던 옛길은 네 명이서 나란히 걸어도 될만큼 넓고 완만한 오르막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얘기도 나누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인사를 나눈다. 또 혼자 걸으면 풍경이 가슴 한가득 다가와 채워주기도 하였다.
칡이 많아서 밭을 이뤘다 하여 칡밭목이라 불리우는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겨울에 답사 왔을 때는 얼음을 깨고 물을 받았던 곳인데 봄 물이 제법 많이 흘러갔다. 사람들은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서로 권하며 나눠 먹는다. 학교 다닐 때는 김밥이 최고 인줄만 알았는데 들로 소풍 나와서 먹는 밥은 반찬 없이도 달고 맛있기만 하다. 아무래도 밥에 햇빛과 소나무향, 시냇물소리, 새 소리가 양념을 해 주어서 그런 것일까?
허리를 굽히고 보니 처녀치마, 괴불주머니, 현호색, 족도리풀도 보인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되면 몸 속에 간직하고 있던 다채로운 색깔을 피워내는 식물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점심을 먹은 뒤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 일월산 정상쪽으로 걷는다. 칡밭목에서 우련전으로 걸어가면 20분이면 걸을 길을 우린 돌아가기로 한다. 2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하며 걷는 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좀 오르막인데 여기 저기 오징어땅콩 과자가 떨어져 있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표시하기 위해 떨어뜨려 놓은 걸까? 저 앞의 메구님 손엔 과자봉지는 보이지 않고 진달래꽃에 카메라만 들이대고 있다.
살결 하얀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간벌을 해서 휑하니 머리를 민 듯한 산길을 지나면서 사람들의 재잘거림에는 행복감이 묻어 난다.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절벽 끝에 분홍 진달래가 피어있다. 잡은 암소를 놓으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이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한 노옹의 헌화가가 생각나는 그 광경이다.
나는 꺾어 바칠 사람이 없으므로 꺾어 화전을 만들어야겠다며 꽃잎을 땄다. 자기를 보호하느라 가시를 세운 두릅에게 미안해 하면서 두릅도 따고 쑥도 한웅큼 뜯었다. 그리고 보랏빛 제비꽃도 뜯어 그릇에 잘 넣어두었다.
우련전에서 남회령 가는 길은 낙엽송 숲길이다. 이파리가 아직 많이 돋지는 않았지만 쭉쭉 뻗은 낙엽송 숲길로 빨강, 노랑,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꽃처럼 어울려 걸어간다. 흙길이어서 더 정감이 가는 이 길은 시냇물을 끼고 이쪽 저쪽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며 봉화도 갔다가 영양도 걷다가 한다. 그러다가 신발을 벗고 냇물로 들어가 발을 담그었다. 15키로를 걸은 수고한 발은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에 담겨지자 정신을 차리며 다시 걸을 채비를 해 주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숙소로 향한다. 백년도 넘은 솔밭 사이에 지은 펜션에서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불가로 모여들었다. 남자들은 잔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우고 일부는 술을 돌리고, 또 일부는 주방에서 화전을 부쳤다. 찹쌀을 반죽해서 동그랗고 납작하게 빚은 다음 기름에 부친 뒤 진달래 꽃잎을 올려 조금 더 열을 가하면 진달래 향이 은은한 화전이 된다. 제비꽃과 쑥도 넣고 화전을 부쳐본다.
노랗게 타오르는 불꽃 주변에 모여 막걸리에 낮에 딴 두릅과 달새님이 가져오신 두릅으로 안주를 삼고 화전에 봄 정취를 제대로 느껴본다. 아무래도 진작에 도시의 복잡함을 내려놨지 싶다.
다음날이다. 십분을 늦췄다 땡겼다 하면서 일정을 조정했는데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벌써 펜션 뒤 골짜기까지 다녀오고 뒷정리도 말끔하게 끝냈다.
시인 조지훈님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에서는 그의 문학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채 일정에 쫒겨 짧은 해설만을 듣고는 주실마을 숲을 거쳐 논두렁길로 해서 영양시장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세 번째 답사와서는 일부 혼자서 걸었던 장군천수로 길이다. 4월초에 왔을 때와는 달리 풀이 많이 나왔고 겨울잠에서 깬 뱀들이 다닌 뱀구멍도 간간히 보였다. 이런 외길을 앞장서서 걷는다는 게 좀 겁이 나기도 하였다.
상원리와 노루목재의 오르막길을 두 번 넘으며 살림 잘하는 여인네들은 취나물도 뜯고, 잔대 잎도 뜯고 다래 순도 훑었다. 난 소복히 피어난 각시붓꽃을 키 작은 화분에 옮겨 심어 두고 두고 봤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들었다. 그리고 자잘한 흰 황새냉이 꽃을 보며 원피스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삼지리 연못에서 도보를 마치기로 했다. 2키로 정도만 더 가면 목적지이지만 점심때가 지나 있었고 더위는 걸음을 지치게 했다. 이틀을 32키로를 걸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영양시장에서 점심으로 보리밥을 한 그릇씩 사 먹고 사람들은 산마늘, 취나물 등 봄나물과 일본시대때의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몇 병 샀고 여행을 가면 그 지역 특산물을 사는 버릇이 있는 나는 산에서 캤다는 지치를 몇뿌리 샀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영양을 벗어나 봉화로 향한다. 모자라는 회비에 신경쓰며 살림 꾸린 총무님, 뒤쳐진 사람들과 같이 걸어준 사람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러 준 맵시님,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며 잠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간간히 들었던 길이 아름다웠다는 말, 좋은 길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다음엔 또 어느 오지로 길을 나서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