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행
퇴원후 엄마는 37.9도의 열이 올랐다. 늘 저녁때 6시에서 10시까지 그랬다. 내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맡기던 버릇으로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찬물에 수건을 적시고 얼음을 수건에 싸서 머리와 발을 차갑게 했고 학교 보건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열은 미지근한 물로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참을성이 많아서 그렇게 암세포가 퍼지도록 참고만 있었던 엄마는 숨을 내 쉴때마다 신음소리도 같이 딸려 나왔다. 잠깐 잠이 들었다 싶으면 헛소리를 하고 죽은 사람들이 보이고, 발목을 누가 잘라서 던지더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열이 많으면 발목을 칼로 자르는 것 같다는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약 5일 정도 그렇게 열이 올라서 엄마의 혀와 입술은 갈라지고 귀도 긁어서 딱지가 앉고 잦은 열 체크로 귓구멍도 짓무르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29일 아침에 응급실로 가서 이런저런 처방을 받았다. 이후로 열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는데 전혀 드시질 못하였다. 심지어 하루 한 컵의 물 조차도.
나는 조바심이 났다. 가보고 싶은 데를 가보고 돌아가셔야 되지 않을까 해서. 며칠간 지켜 보니 열이 더 이상 오르지 않아서 조심조심 고향을 가기로 했다. 응급실 다녀오고 3일만이었다.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스물아홉에 생을 마감한 둘째언니의 깡마른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춘천 5촌댁에 들러서 소양호의 유람선을 1시간을 탔고 홍천으로 넘어왔다.
고모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눈만 감으면 보인다던 메밀전을 고모가 새벽부터 부쳐 주셨다. 비릿한 것을 전혀 드시지 않는 고모 내외분들은 이면수를 사다가 양념을 얹어 찌고 여러가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한가하게 친척들 만나러 다닐 팔자가 아닌 엄마와 또 마찬가지인 고모는 서로 고향같이 서로 의지하는 마음을 지녔을 거 같다. 엄마가 시집와서 4년을 같이 살다가 고모가 시집을 갔고 그다지 먼 곳이 아닌 이웃에서 살았으니 예전의 피는 물보다 진했을 터였겠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2키로 정도 거리에 있던 고모네 집은 늘 먹을 게 풍족했다. 집 주변에 온갖 과실수가 있었고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모네는 집 주변에 온갖 과일 나무와 꽃이 있고 밭에는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 해서 고모부처럼 부지런한 사람과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고모부는 뒤곁의 지하수가 나가는 고랑을 파서 나무와 연결을 해 놓기도 했고 마당 끝의 달래 무더기 속에서도 잡초 하나 없이 김을 다 매 놓았다.
작약은 나중에 내가 집을 지으면 몇 뿌리 얻어 갔으면 좋겠다.
30여년전부터 그대로 있는 변소, 지금은 헛간으로 쓰는 곳에서 큰 길을 내다보면 밀밭 너머로 큰 집을 신축하고 있다.
고모와 고모부는 그럴분들이 아닌데 선뜻 사진을 같이 찍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사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