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
대학 다닐 때 오디오가 갖고 싶었다. 그러나 등록금 내기도 늘 빠듯한 생활에 오디오는 멀게 느껴졌는데 LP 판을 한 두 개씩 샀다. 판을 사 모으다 보면 언젠가 오디오도 사게 되겠지.
그제 화로를 샀다. 집을 짓게 되면 아궁이의 불을 고물개로 긁어 화로에 담아 두고 밤이랑 감자 등을 굽거나 찻물을 올려 놓으면 내킬 때 바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말이다.
화로 샀다고 자랑을 했더니 은마래 언니는 "삐꾸 사 놓고 기타 샀다고 하는 격"이란다. 큰언니는
"넌 참 이상한 애야."
라고 했다.
강원도 홍천의 겨울은 길었다. 저녁무렵 엄마는 시계가 있는 숙자네 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지 보라고 했다. 나는 사립문 문지방에 올라서서 개울 건너 숙자네 굴뚝을 보고는 연기가 난다고 하면 엄마는 무쇠솥을 안친 아궁이에 갈나무를 八자로 놓고는 검불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곤 했다.
가운데 걸린 까맣고 반들반들한 무쇠솥에서 김을 내뿜으면 불을 가장 큰 솥쪽으로 돌려서 불기운이 잦아들게 했다. 큰 솥은 더운물로 세수를 하거나 걸레를 빠는 물로 쓰였다.
밥이 거의 뜸이 들 무렵 이번엔 고물개로 뻘건 알불을 부삽에 담아서 화로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고물개로 꼭꼭 불을 눌러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이 엉성하게 담겨 있으면 빨리 희나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 위에 부젓가락을 올리고 국을 끓이거나 어쩌다 아주 어쩌다가 광에 걸려 있는 석쇠를 꺼내 자반 고등어를 굽기도 했다. 자반 고등어는 주로 숙자네 고모가 생선을 머리에 이고 다녀간 뒤에 주로 그랬다. 엄마는 팥이나 콩 등을 됫박으로 돼서 숙자네 고모를 드렸다.
무쇠화로 안의 빨간 불씨가 점점 하얗게 재를 만들어가며 자반 고등어가 지글지글 노랗게 익어가는데 소죽 끓이던 아버지는 왜 그렇게 동작이 굼뜬지 자꾸 사랑채의 부엌으로 눈이 갔다.
저녁을 먹고 나면 기름을 떨궈 가며 생선을 굽던 화로의 흔적을 부지깽이로 쓰적쓰적 문지른 뒤 윗방 쪽에 놓았다. 아랫목은 절절 끓는데 윗방은 큰방에서 윗방으로 방고래가 열결되는터라 불을 땐 겨울이라도 코가 시렸다. 그 시린 윗목에 화로를 놓고는 작은 언니는 작아 못 입게 된 쉐타를 풀어 주전자 위 뚜껑의 김나오는 곳에서 물 나오는 주둥이 쪽에 실을 연결하여 증기를 쐬어 라면처럼 꼬불꼬불해진 실을 폈다.
아침에 땐 불을 화로에 담아 헤적이지 않고 꼭꼭 눌어두면 점심때 까지 그대로 있다. 셋째 언니는 노란 양푼에 김치를 송송 썰어 깔고 그 위에 밥을 덮었다. 그리고 들기름을 찔끔 몇 방울을 떨어 뜨렸다. 김치 익는 냄새가 들기름 냄새와 어울어지면 아버지는 땔감을 한 짐 부려 놓고는 머리에 갈잎을 뜯어내며 방으로 들어선다.
김치볶음밥을 비벼서 동치미 한 사발과 물을 드시고는 아버지는 곧 일어나셨다. 두번째 땔감을 하러 나서는 것이다. 아버지의 땔감은 지게보다 훨씬 높아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땔감 덩어리가 휘청휘청 걸어 오는 듯 하였다. 나뭇단의 높이가 얼마나 높았으면 사랑채의 처마에 닿아서 아버지는 다리를 약간 구부렸다 펴야 했다.
활달한 둘째 언니는 나보다 9살 위인데 어찌어찌해서 계란이 생기면 젓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조금 깨어낸 다음 흰자와 노른자를 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씻은 쌀을 넣고는 화로불 가장자리 불이 세지 않는 곳을 골라 심듯이 계란을 꽂아 놓았다. 그러면 작은 계란에서 밥이 보글거리며 끓는다.
큰언니 꿈은 가수였다. 숟가락을 들고 노래를 부르거나 저녁무렵 화기가 약해진 화로 위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화로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물론 그 소리는 담장을 넘지는 않았으니 가수가 될 리가 없었다.
오디오와 화로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 부터 사 모으는 것. 그러나 오늘 둘은 같은 맥락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화로를 집을 짓기 전에 소품부터 사 모은다고 생각하면서 샀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사고 싶었던 건 화로가 아니라 화로에 깃들여 있던 아련한 추억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