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만들기
"스님, 어디 가세요?"
밭을 둘러 보고 천천히 차를 운전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쪽에서 회색빛 승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오는 비구니 스님과 마주했다.
"왜요?"
짤막한 두 마디에서 경계의 마음이 느껴졌다.
"지지난주에 낙산사에서 산사체험 했었는데 스님 보면 그냥 반가워서요. "
했더니 스님이 자전거를 세운다.
"어디 시원한 데 가서 수박이나 쪼개 먹을까요?"
나야 에어컨 켠 차 안에서 기껏 오른발이나 까딱거리거나 핸들을 돌리는 게 고작인데 스님은 바늘같은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긴 팔의 승복을 입고 거기다가 자전거를 돌리고 있었으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리라.
"수박은 집에 가서 먹어요."
하신다.
"어자피 집에 가도 혼자 먹을 건데요. 뭘."
했더니 혼자라는 말에 말투가 확 달라지며 혼자 사냐고 한다. 그런다고 했더니 스님은 그럼 자기네 집에 가서 먹자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가던 방향으로 가고 나는 차를 돌려 스님을 쫒아간다. 스님은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내가 자전거를 탈 때는 쫄바지를 입어 거추장스럽지 않게 하는데 스님이 페달을 돌릴 때마다 휘날리는 그 통 넓은 승복은 바람을 맞아서 페달질 하는 게 더 힘들어 보였다.
자전거도 페달을 한 번 돌리면 몇 미터나 굴러가는 성능좋은 내 자전거가 아닌 계속 페달질을 해야만 굴러가는 어디 아파트 구석진 곳에서 끌고 왔음직한 그런 자전거를 열심히 돌리며 앞서 가신다.
"스님 바꿔 탈까요?"
뒤를 쫒아 가다보니 차로 스님을 몰고 가는 격이어서 스님은 어쩔 수 없이 페달질을 쉴 새 없이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조금만 가면돼요."
스님은 비탈진 고갯길에서 삐걱거리던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 갔다.
"여기만 넘으면 돼요."
그리하여 찾아간 스님네 집. 부처님을 모셔 놓지 않았다면 구조나 위치나 일반 가정 같은 집이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스님은 이것저것 내오셨고 나는 차 안에서 이미 따뜻하게 데워진 수박을 꺼내 놓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수박도 사 먹을 수 없다며 장덕리 사는 아는 언니가 삼겹살을 구워주며 오라고 부른 터였다. 1/4쪽을 나눠 주면서 혼자 사는 딸이 수박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는 말을 듣고 내 생각을 했다나.
스님과의 인연은 작년에 그렇게 만들어졌다.
절 생활에 3달 이상을 한 곳에서 머물지 않았다는 스님은 자기 집이 생겨서 어디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며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 휴대폰마저도 꺼 놓고 산다. 그래서 불쑥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데 며칠전에도 차를 마당에 세웠더니 창문 너머로 내다 보신다.
그 사이 나는 무릎 수술로 목발로 어설프게 차에서 내렸는데 집 처마 밑 봉당에 기다란 뭐가 스르륵 움직이길래 하마터면 외발로 서 있다가 자빠질뻔 했다.
"뱀 무섭지 않으세요? 자전거 세워둔 데 기왓장 밑으로 들어가던데요."
했더니
"썩을~~"
하면서 어느 지방 말투인지 모르게 한마디를 하시고는 내 앉아 있는 구석진 곳을 가리키며 거기에도 있는걸 작대기로 들어내 밭에다 버렸다고 한다.
"물까봐 무섭지 않으세요"
했더니 무섭지는 않은데 좀 징그럽다며 씩 웃는데 웃는 모습이 꼭 애들 같다.
스님은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1인분 국수를 두 그릇으로 나눠 주셨고 국물에 찬밥을 말아 먹었다.
스님은 간만에 사람을 만나 이야길 하다보니 말이 입속에서 꼬인다면서도 둘이 앉아 폭풍수다를 몇 시간을 떨었다. 아끼며 먹는 차라며 주둥이를 비비틀어 놓은 차를 내주기도 했는데 다음엔 내가 차를 좀 갖다 드리겠다고 했다.
그만 가야겠다고 나서는데 머우랑 고춧잎 삶은 거를 건넨다.
"보살님이 준 아로니아는 저 쪽에 심었는데 잘 크고 있어요."
자잘한 자갈을 깔아 놓은 마당의 언저리엔 진보랏빛 작약이 한창이다.
나도 작약을 좋아한댔더니 작년에 뭔지도 모르고 다 쥐어 뜯어 놨다고 웃는다.
내년 봄엔 작약을 좀 나눠 달라고 불쑥 스님네 마당에 차를 세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