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 흑산도
아는 분한테서 문자가 한 통이 날아왔다.
"추석 연휴에 홍도 가지 않을래?"
문자를 읽자마자 바로 콜을 날려 보냈다.
홍도의 비경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목포까지 가는 차도 만만치 않고 또 배를 타고 가야 하는지라 늘 언젠가 가 봐야 할 곳으로 뇌의 저 쪽 구석에 항상 자리하고있던 터였다.
25일. 조퇴를 하고 강릉에서 광주가는 버스를 탔다. 좌석도 꽉 찼고 가다 서다 반복하는 버스 속에서 산소도 부족하고 답답한 공기에 울화증이 치민다. 톨게이트가 나오면 차라리 내려서 찻길을 어느 정도 걸은 뒤 여관방에서 하루 묵고 강릉으로 돌아 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7시간을 달려 광주터미널에 도착하여 일행 셋을 만나서 목포로 향했다. 여관방에 드니 12시.
26일이다. 꽉 막힌 도로를 우회하여 겨우 배 표를 끊어 우리가 배에 오르자 육지와 연결해 있던 사슬 고리를 벗겨 배에 걸어준다. 아슬아슬하게 홍도행 배를 탄 것이다.
홍도까지는 2시간 반.
점심을 사 먹고 12시 반에 출발하는 유람선을 탔다.
요즘 한창 지층에 대해 배우는 아이들에게 습곡에 대해 알려주면 좋겠다며 사진을 찍었다. 식빵 사이에 쨈을 발라 켜켜이 쌓고 압력을 주면서 실험을 하면 지층은 남지 않고 식빵만 머릿속에 남을 수업에 이 사진 한장을 직접 찍었다고 보여 주면 그래도 지층이 조금은 남을 것 같다.
패키지 여행이나 깃발을 따라다니는 수동적이고 정해진 코스대로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홍도 선착장에서 바다가 안 보이는 방에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낼 것이냐 아니면 50여 가구 사는데 추석 쇠러 육지로 다 나가서 3집 밖에 안 남아서 잘 곳, 먹을 것이 보장되지 않는 남들이 다들 만류하는 2구로 갈 것이냐를 의논했다.
유람선은 걱정스럽게 2구에 내려 주고는 내일 8시에 데릴러 온다고 했다.
듣던대로 2구 동네는 조용했다.
작은 마을에 성당, 교회가 있고 폐교가 있어서 잠잘 곳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굳이 인공 건축물이 아닌 잔디가 깔린 폐교 마당에서 하룻밤 자고 싶었다.
보통 퇴근을 하고 저녁 준비를 한 뒤 밥상머리에서 항상 마주하는 6시 내고향 프로에서 바닷가 어민들이 나오는 걸 보면 나도 가서 체험을 하고 싶단 생각을 늘 했었다. 등대로 가는 길에서 찍은 바닷가 마을은 이런 나의 호기심을 조금씩 채워 주었다.
산밑자락에 있는 등대는 부지런한 직원들의 손길로 단정하게 나무들이 손질되어 있었고 애호박은 가족과 떨어진 가장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된장찌개를 끓이는 게 연상이 되었다.
등대에서 내려오며 셀프 타이머를 이용해서 한 컷 찍었다.
강릉에서 광주까지 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갔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홍도를 간다고 했더니 어깨를 치면서
"이런 때엔 집에 있어야지 어딜 가!"
하는 말에 나도 민족 대이동이 어김없이 일어나는 추석 연휴에 움직인다는 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버스를 타는 건 그렇다고 쳐도 배는 예약이 되어서 문제 될 건 없었는데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서 정원 초과를 해서 배편을 운행할 거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섬 사람들은 명절을 쇠러 육지로 나오는 것이다. 나중에 배 값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목포에서 홍도까지 배편이 편도 42천원인데 섬 주민은 5천원밖에 하지 않는거다. 자식들 4식구가 움직인다면 3십만원 정도가 배값이 들 정도다. 복잡할 것을 예상하고 움직이긴 했지만 오히려 섬에서의 한산한 여행이 되었다.
물 빠진 갯바위에 나가 고둥, 청각, 거북손을 따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 고둥을 까 먹고는 내일은 흑산도로 가기로 하였다.
27일. 홍도에서 흑산도까지는 30분 거리였다.
흑산도에 도착하여 정자를 찾아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다. 아침도 라면, 점심도 라면. 이번 라면엔 파도 썰어 넣고 떡볶이도 넣어 좀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객선 터미널 옆에 대형 마트가 있었던 터다. 어쨌든 홍도보다는 흑산도가 훨씬 컸다.
홍도는 섬이 작아서 차가 없는데 흑산도는 택시를 잡아서 일주를 하는 게 여행객들의 정해진 코스라고 한다. 이미 일행 중 한 사람이 택시를 잡아 놓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노선을 확인하던 나는 택시기사가 이끄는대로 따라 다니는 정해진 코스의 여행이 아닌 내키는 대로 좀 모험을 하면서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더니 다들 괜찮다고 한다. 요금도 택시가 6만원이라면 버스는 4천원에 해결되니 경제적이기도 했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괜찮다 싶은 곳에서 내려서 숙박이나 식사를 알아보고 정 안 되면 다음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면 될 테니까.
정거장에 웬 아주머니가 앉아 계신걸로 보아 버스가 곧 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아주머니께 이것 저것 흑산도 섬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니 사리라는 곳이 숙박도 되고 마을도 형성되어 있어서 묵기에 적당하단다.
버스에서 내리며 어머니 같다며 손을 잡았더니 아주머니는 손을 맞잡는다. 자식들을 객지로 다 보내고 홀로 섬에서 사는 아주머니의 애잔함이 느껴졌다.
사리에 내려 처음 맞닥뜨린 포구다. 돌멩이로 가지런히 쌓은 돌담이 정겹게 느껴진다.
마을회관 앞 정자에 짐을 내려놓고 동네 구경을 나간다. 북쪽으로 초가집이 보이길래 리어카만 겨우 들어갈만한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 초가집으로 갔더니 다산 정약용님의 형 정약전의 유배지라 유배체험장소로 "위리안치" 등이라 안내문이 쓰여있다. 위리안치라는 것은 집 주변에 탱자나무를 둘러 심어 놓고 집 밖으로는 한발짝도 나설 수 없는 감옥살이인 것이다. 그 옆에 체험용 숙박시설이 있었다.
성당 건물 위에 작은 초가집이 있길래 올라갔더니 한 분이 나오시며 이야기를 들려 주시겠단다.
신유박해 때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유배를 내려 오다가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갈라졌다는 이야길 알고 있었다. 한때 정약용 선생에 관심을 가져서 강진까지 내려 간 적이 있다고 했더니 아주 청산유수로 말씀을 잘 해 주셨다. 선교사라는 이 분은 향토사학자로 정약전의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다. 성당에 푹 빠진 오빠한테 녹음을 해서 들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 분처럼 한 마을의 역사적 사실들을 연구하고 발굴해서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만.
정약전 유배지에서 내려다 본 사리 마을 전경이다. 초등학교는 이미 폐교 되어 아이들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학교로 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설명을 잘 듣고 마을 회관앞 정자에서 쉬고 있는데 추석을 쇠러 고향을 방문한 서울에서 온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이 작은 마을을 오게 됐느냐? 섬 한바퀴를 돌았냐고 하길래 아직 안 돌았다고 했더니 차 열쇠를 줄테니 한 바퀴 돌아 오란다. 얼마후 차를 끌고 오신 서울사는 아저씨는 길이 초행이고 급경사라 위험하니 자기가 운전을 해서 안내를 해 주시겠단다.
입이 헤벌쭉 벌어져 아저씨가 안내하는 곳을 구경을 하는데 역시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한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앞에서 노래를 알았다면 멋지게 한 곡 뽑았으면 좋겠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그 노래를 꼭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탔던 마을회관 앞 정자앞에서 서울 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저녁때가 다 되어 어디 저녁밥을 먹을데가 없을까 하여 여쭤 봤더니 어우러져있던 서너분이 이 마을에는 식당이 없다고 한다. 숙소를 묻길래 정약전 유배지 체험마을에 묵는다 했더니 한 분이 우리 마을에 온 손님인데 저녁을 굶길 수는 없다며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한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거실로 밀고 들어가 앉았는데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우리에게 안주인이 어이없어 하면서도 과일을 내 왔다.
이어 아저씨는 삼치 얼린 것을 회를 떠 오셨다. 간장에 양파, 고춧가루, 참깨로 양념한 양념간장이다. 김과 함께 싸 먹으니 '차기이장님' 말대로 이빨에 끼지 않고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인 '본젤라또'같다. 다들 처음 먹어 본다고 하였다.
압력솥의 추가 돌아가며 김을 뿜는 소리가 칙칙 들리고 부지런하게 주방을 움직이던 안주인은 어촌의 가정에서 먹는 보통의 음식들을 내오셨다. 미역국은 돌미역으로 자연산이라 한참을 끓여야 한댔는데 역시 깊은 맛이 난다. 멸치는 아저씨가 직접 잡아 말린 것으로 짜지도 않아서 고추장을 찍어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8일. 연휴가 하루 더 남아 있었지만 10여시간을 차를 타며 강릉으로 돌아 올 생각에 일행중에 나 혼자 하루 일찍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며 친구에게 대전쯤으로 마중을 나오라 했다.
아침 6시 반이 되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낙지를 잡아보겠다고 낙지를 담을 비닐 봉지를 들고 낚시를 하겠다고 전날 사온 낚시대를 챙기는 동찬씨와 둘이 포구로 나왔다.
나는 돌멩이를 뒤집어 게를 잡고, 굴도 따고, 홍합도 따고, 주황색인 가리비 2개도 따서 동찬씨한테 가 봤더니 손바닥보다 작은 우럭 새끼 한 마리가 시커먼 양동이에서 헤엄을 친다. 이미 8시 반이라, 그만 접고 숙소로 돌아와야겠다며 우럭 새끼인지 확인할 겸 통발 쳐 놓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들고 갔더니 매운탕 끓여 먹으면 맛있다며 펄떡이는 우럭 3마리와 꽃게, 홍합을 한웅큼 주신다.
이 웬 횡재냐싶어 신나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생선을 준 사람들 뒷모습마저 아름다운 건 아침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낚시로 잡았다고 하니까 안 믿더니 내가 딴 굴도 보여주니 그럴싸한가보다. 더 가서 잡자고 흥분해서 말한다.
숙소로 돌아와 뭘 해 먹을까 하는데 식기류라고는 2인용 코펠과 버너가 전부다. 숙소 아랫집으로 가서 칼과 도마를 빌렸다.
남자들은 못한다고 빠지고 한 번도 칼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언니가 발 닦던 수건으로 우럭의 눈을 가리고 목을 딴다.
언니가 회를 뜨는 동안 나는 목욕탕 변기에 앉아 칫솔로 굴을 씻었다.
매운탕을 끓이려니 냄비가 없어서 이번엔 다른 집에서 빌려오고 무를 넣어야 할 것 같아 구해 오라 했더니 동찬씨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를 구해 왔다. 열집은 더 다녔는데 밭일 하는 할머니께 여쭤봤더니 집에 까지 가서 주셨다고 했다.
냄비를 구했는데 이런, 가스가 떨어졌다. 가스를 사러 갔더니 동그란 가스는 없고 원기둥형 가스만 있는터라 가스버너를 또 빌려 왔다. 결국 우리의 아침거리를 위해 동네를 다 뒤져서 4집에서 장만을 해 온 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네 사람들이 우리에게 뭘 빌려 줬는지 동네 소문이 다 나 버렸다.
한참만에야 우리는 우럭회를 한 점씩 들고 건배를 했다.
여행의 참맛이 어쩌구 저쩌구 이야길 하고 있는데 지난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저녁상을 아는 형님게 부탁하던 그 '차기이장'님이 숙소로 왔다. 간밤에 실수를 했나해서 미안한 마음에 들렀는데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길 하다보니 배를 가지고 있었다. 낮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낚시도 하고 동굴에 들어가 거북손도 따서 삶아 먹고 따개비죽도 끓여 먹자고 한다. 오 마이 갓! 2시 배를 타려면 12시에는 나가야 하는데 1시에 배를 타잔다. 이미 동해에서 친구가 출발해서 대전으로 오고 있는데, 하루 더 묵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언니에게 대신 말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1시가 덜 되어 나는 배를 태워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화를 내를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하루를 더 있기로 했다.
동굴에서 끓여 먹을 라면과 찐 굴을 들고 포구로 향했다.
거동이 불편한 동네 분들이 자가용을 한 대씩 끌고 마을회관으로 나오시고
노를 저어 움직이는 무동력 쪽배에 탄 후
동력 배로 옮겨 탔다.
6시 내고향을 보면 리포터가 배에 올라 바다에서 고기잡는 어부들을 취재를 하는 걸 보면서 나도 배에 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 힘을 받아 솟아오른 바위는 잔칼질 하듯 사선으로 비껴서 바위를 만들고 이따금씩 동굴도 만들어 놓았다.
일행중 멀미를 해서 갯바위 위에 모두 내렸다. 여기서 일명 갯바위 낚시를 하려는 참이다.
갯바위에 앉아 라면을 끓이고 국물에 햇반을 넣으니 죽이 되고
거기에 따개를 넣으니 따개비죽이 되었다.
우리는 일명 차기이장님이라 불리는 이 귀촌한 선주는 뭍사람들에게 맛보여 줄려고 핥아 끌고 들어갈 듯 날름거리는 파도를 피해 거북손을 따서 끓여준다.
이 때쯤 걸려온 친구의 전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넘어 오지 말라고 했으니 열불이 나서 대전까지 달려왔으니 섬에서 나오란다. 파도에 따 온 차기이장님 성의를 무시하듯 한 개만 집어 먹고는 좌불안석이다. 일을 내도 낼 놈이다.
동찬씨의 대나무 낚시가 한 번 곡선으로 휘어지긴 했지만 우리는 우럭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배를 타고 돌아왔다.
동네 구멍가게 안주인이 20여가지 약초를 넣고 담갔다는 막걸를 한 사발씩 들이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돌담이 이뻐서 한 컷 찍었다.
차기이장님은 자기가 쌓았다고 하는데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라 농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갔다.
숙소 한 동으로 차기이장님과 동네 친구들이 얼린 삼치를 한마리 들고 왔다. 양념장은 싱글인 자기가 손수 했다며 강조를 한다.
껍질을 벗기고 포를 떠서
김 한 장에 양념장을 올려 놓고 싸 먹으면 회가 본젤라또처럼 살살 녹아 없어졌다.
삼치 한 마리를 다 해치우고 밖을 나와보니 보름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이제 내일이면 우리 여행객들은 섬을 떠나 세월속에 금방 잊혀지겠지만 간만에 고향을 찾은 친구들을 보내고 홀로 남게 될 차기이장은 그 외로움이 절절이 남아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캠프화이어를 하자고 한다.
술이 잔뜩 취한 00형은 드디어 길바닥이 안방인양 주저앉아 있고
동네 어르신들이 한 마디씩 할까봐 동네가 안 보이는 양식장 구석에서 땔감으로 쌓아 놓았던 바짝 마른 나무를 뽑아와 불을 놓았다.
6, 70년대생 사람들이라 70, 80 노래들을 불렀다. 아마도 열정 가득한 삶의 한 가운데서 살짝 비껴 나가 이젠 여유를 찾아가는 40대 후반의 시기에 이렇게 고향에, 혹은 여행지에서 불과 마주 하고 있으니 오랫만에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어지기가 서운하여 자꾸 인사가 길어지던 차기이장은 한 군데 숙소를 더 들러서 시간을 끌다가 결국엔 몇 번의 인사를 반복하며 헤어졌다.
내 나름대로 여행의 정의를 연령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40대의 여행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 시작은 경치였지만 이번에도 여행은 사람을 만나러 간 일이 되었다.
나 또한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려고 섬에서 나지 않는 유기농 쌀을 한 자루 보내려고 오늘밤 쌀자루에 주소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