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골을 끓이면서
사골을 끓인다 핏믈을 빼내고 오랜시간 집안 온통 수증기를 가득채우며.
음식을 보면서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건 이젠 슬픈 일이다.
며칠전 주문진 시장에 갔다가 문어를 보고 빨판을 단추같다며 좋아하던 엄마는
이젠 문어를 드실 수가 없다. 이젠 문어를 사는 일이 드물 것이다.
그 좋아하던 살짝 구운 쇠고기도.
갈아서 미음을 쑤었지만 그 조차 넘기지 못하고 입안에 물고 있다.
사골을 끓여서 드리면 좀 넘기실라나.
영양제조차 맞지 않고 열흘을 보내는 엄마를 생각해 쇠고기를 사골과 같이 푹 끓인다. 영양 성분이 좀 빠져 나오라고.
호기심 많은 엄마는 처음 접하는 걸 좋아했다. 음식도. 스파게티를 사 드렸을 땐 맵지않은 빨간 국수를 먹었다고 친구들한테 자랑도 했댄다.
그런 별난 걸 해 드렸어도 또 뭐가 없을까 해 보지만 이젠 넘기지도 못한다
어쩌면 사골국이 엄마께 해 드리는 마지막 음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면 기운차리지 말고 얼른 돌아가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운내시라고 사골을 끓이고 있는 건 또 무슨 이율배반적인 행동인지.
엄마의 암덩어리는 점점 커지고 폐를 압박해 와 앞으로는 가래가 끓고 그걸 기계로 뽑아내야 할테고 뼈에 가죽만 입혀 놓은 것 같은 기력 없는 몸뚱이는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힘들어 할 거다. 결국 숨이 차서 산소호흡기를 할테고 그러다가 숨이 잦아 들 것이다. 쥐어짜듯 온 생명을 마지막까지 다 짜 버린 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이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으니 글로 설워 하노라.
고등학교때 배웠던 시조 한 수가 생각난다.
어느 집에 갔는데 쟁반에 홍시를 내 온 걸 보고 누가 유자를 어머니 드릴려고 옷깃에 품어 몰래 갖다 드렸다는 걸 생각해 냈는데 그렇게 홍시를 품어가도 반길 어머니가 없어서 글로써 서러움을 표현한다는 시조이다.
앞으로 어머니를 그리며 떠올릴 조홍감이 얼마나 많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