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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종이꽃

햇살가득한 2016. 2. 13. 15:00

 

 

엄마는 꽃을 좋아했다. 아니 꽃을 좋아하기 이전에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을 좋아했고 어려운 사람, 불쌍한 것들에 대해 연민하며 도와 주기를 좋아하셨다.

40여년전. 내가 시골에 살 때 동네를 돌면서 얻어 먹는 동창의 삼촌이 계셨다. 지능이 좀 모자랐는데 주름살이 깊게 패인 걸로 보아 그 때 당시 4~50줄 되었었나보다. 아이들은 그 아저씨에게 돌도 던지고 못살게 굴었지만 엄마는 그런 사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라고 하셔서 나는 한 번도 그 아저씨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그 아저씨를 앞 개울에서 씻기는 걸 보았다. 엄마 그 때의 연세가 40줄이었을텐데 그것도 외갓남자를 씻긴다는 게 보통 용기로는 되지 않았을텐데 동네 사람들에게 거리낄 게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그랬는지 훤한 대낮에 다 트인 공간에서 씻기던 걸 기억한다.

꽃도 그랬다. 화원에서 곱게 자란 꽃을 사서 가꾸는 것이 아닌 엄마 주머니엔 항상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 뭔 씨앗을 휴지에 받아와 길거리에도 뿌리고 옥상 화분에도 뿌렸다. 

우리 세 자매는 엄마랑 뭉치면 백화점 쇼핑을 다니는 게 아니라 엄마와 꽃구경을 다녔다. 양재동 꽃시장, 한택식물원, 아침고요 수목원... 그리고 방안에 꽃을 키우다 지면 옥상으로 올려 더 살게 했다. 

 

2014년 재작년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통곡을 한 듯 아무 소용이 없을 듯하여 어렵사리 학교에 연가를 이틀 냈다. 통영이랑 남해랑 두루 돌면서 체험 좋아하는 엄마 바지락도 캐서 국끓여 드리고 굴도 따 먹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터져서 가지 못하고 포천에 있는 아침고요 수목원엘 갔다. 

휠체어를 하나 빌려서 언니가 밀고 내가 도시락을 들고 하여. 꽃밭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하루라도 대문을 나서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엄마는 옥상에 꽃을 가꾸셨다. 어디서 받아 왔는지 모를 꽃씨들을 구분없이 뿌려 놓으시고는 어린아기의 재롱을 보듯 기뻐하셨다. 

 

 

 

 

한 번은 어느 집 누가 꽃상여를 타고 가는 걸 부러워 했다는 말을 듣고는 큰언니가 대뜸 꽃상여를 해 준다고 했댄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 그 사실을 알고는 꽃상여를 검색해보니 내가 만들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오빠는 요즘 매장을 하면 동네에서 반대를 한다길래 조심스럽다며 안 하길 원했다. 꽃상여 대신 꽃을 어떻게 장식할까? 생각하다가 관을 꽃으로 덮기로 했다.

일단 흰 광목을 물에 담가 몇 번 주물러 물을 뺀뒤 솥에 폭폭 삶았더니 백열등 같이 자연스런 흰색이 되었다. 그걸 다려 놓고 24시간 병실에 붙어 있는 언니 밥을 갖다 주고 심부름을 하고 집엘 와서 틈틈이 꽃을 접었다.

엄마가 입원할 당시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했었다. 그러더니 말을 못하고 대답만 하더니 나중엔 대답도 못하게 되었다. 차마 관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엄마, 엄마가 꽃 좋아해서 꽃 접고 있어. 가실때 꽃보고 가시라고."하면서 귀에 대고 알려 드렸다.

 

 

조카가 큰 몫을 했고 큰언니 작은언니도 한몫 거들어 아침부터 밤까지 이틀동안 꽃에 매달려 있었더니 허리가 끊어지듯 아팠다. 어머니가 한 분이기에 다행이지 두 번 할 일은 못되었다. 

 

 

 

하나하나 꽃을 접으며 좋은데로 가세요, 천국으로 가세요 하는 기도가 이루어져 천국으로 가는 길에 하얀 순백의 꽃길을 걸으며 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