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감이 안 와서...

햇살가득한 2017. 11. 3. 22:47

어렸을 적 살던 고향은 추워서 감나무가 안됐다. 

동창은 벽장에 넣어 둔 감을 할머니가 꺼내 줬다는데

우린 그런 주전부리 할 여유가 없이 팍팍했다.

그래서 감은 어린 시절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집을 보러 왔을 때 밭 둑으로 큰 감나무가 여나문 개가 있어서 혹한 마음이 들었다. 

봄이 되니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아도 감나무는 죽은 듯 잎도 내지 않고 늦잠을 자더니

잎이 다투어 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하얀 감꽃잎을 달더니 이내 떨어질 건 떨어지고

감이 조그맣게 생기자 벌레가 파먹어 떨어지고

잘 크는가 싶다가도 누렇게 이유없이 떨어지기도 하고...

가을이 되자 벌레 먹지 않은 실한 놈들만 살아 남았다.

약을 안 치니 벌레가 먹어서 자연히 감을 솎아 준 겪이었다.

때문에 드문드문 매달린 감은 보통 어른 주먹 이상이 나왔다.

해마다 감말랭이를 만드는 친구가 감 상태를 보지도 않고는 10박스를 주문했는데

매달린 감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안 와서 서너 박스나 나오려나 하면서 보내지 않기로 했다. 

막상 감을 따 보니 노란 박스로 10박스나 나오겠다.

이걸 어쩐담. 아무리 내가 곶감 귀신이라 해도 감당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물용 중에서도 최고로 큰 걸 골라 친구한테 팔고,

매일밤 감 깎느라 이제 달인이 다 돼 간다.

400키로 이상 나올텐데 이 감을 다 어찌할까나...


우리집은 개울 건너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집들이 소복하게 모여 있는 개울 저쪽 양짓말에 숙자네가 방앗간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숙자네 돌담틈으로 꽤 큰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숙자네 엄마는 노란 살구를 따서 한바가지씩 이웃집에 돌렸다. 

찔끔찔끔 장마가 시작된 그 날도 숙자 엄마가 주신 살구를 한 바가지 들고 

한 손은 회색 주름치마를 틀어 쥐고 불어난 개울을 건넜다.    


한 달여 전, 고향을 지나는 길에 내 목소리도 기억 못하는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 엄마도 함께였다. 

숙자네 엄마를 보자마자 한동안 둘이 끌어 안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작년에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

숙자 엄마는 동갑내기인 친구 생각이 나서. 

담에 또 들리겠다는 말에 꼭 오라며 눈물 짓던 숙자네 엄마도 

이젠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음을 옮겨 놓으셔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 

감을 깎다가 살구의 노란 색이 주황의 감과 겹쳐진다. 

숙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네 주소 좀 보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