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봉투와 민주
설날 아침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아버님이 부르신다.
맏이인 남편과 동생 내외를 불러 앉혀 놓고 두툼한 봉투를 첫째 며느리인 내 앞에 하나는 둘째 며느리 앞에 밀어 놓으신다.
"가지고 있다가 네 형제들 중 누구라도 어려울 때 서로 도와 주거라."
시댁에 설 쇠러 간 여동생들은 나중에 주겠다고 하셨다.
그 묵직한 돈봉투에 아무말도 못하다가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들 병원비, 여행비 등 쓰고 싶은 데 다 쓰시고 그래도 남으면 나눠 달라는 게 내 지론인지라
"병원비..."
하는데 아버님이 말을 잘라서 다른 말로 이어 나가신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아버님 말씀만을 듣다가 동생 내외는 뜻을 잘 알겠다며 받아들었고
남편은 바닥에 놓여진 돈 뭉치를 내 손에 쥐어 주고 일어섰다.
고맙다고 해야할 지, 잘 쓰겠다고 해야 할 지, 안 받겠다고 해야할지...
결국 아무말도 못하고 나왔다.
밭에서 30센치 이상 뿌리를 뻗은 도라지를 쇠스랑으로 힘겹게 파낸 뒤
장날 어머니가 파출소 앞 난전에 앉아 껍데기를 까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남편과 나는 피해야 하는 물건인 양 안 갖겠다며 서로 상대방 소품들 틈에 끼워 뒀다가
결국 남편 통장에 넣기로 했다.
"도라지 까 판 돈을 어떻게 쓰냐?"
우리 개 이름은 오월이와 민주.
2018년 5월 18일 태어났대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어미를 60만원을 주고 사왔다고는 하나 순수 진도개의 혈통은 아닐 것이다.
어제는 민주가 털이 잔뜩 젖어서 삐죽삐죽한 고슴도치마냥 돼서 들어왔다.
목덜미에는 핏자국도 있다. 주둥이에 핏자국이 없는 걸로 보아 짐승을 잡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른쪽 눈 밑에는 털을 가르는 상처도 길게 났다.
남편은 윗집 개와 싸운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8개월이 된 민주는 사타구니가 제법 수컷 티가 나고
같은 배의 암컷 오월이 보다 두상도 훨씬 더 크다.
윗집에 암컷이 있다고 했다. 여러 수컷들에게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었던가보다.
민주는 지쳐서 그늘이 진 찬 곳에서 늘어져 몸을 납작하게 하고 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이다.
표정도 무표정한 것이 불러도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 낮에는 산쪽을 보면서 여러 번 짖는다.
짐승을 몰 때도 짖기보다 날렵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과묵한 녀석인데 말이다.
남편은 민주가 싸우고 돌아와서 다시 싸우러 가는 걸 말렸다고 했다.
분이 안 풀려서 그러는 거라며 민주의 표정으로 보아 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집 숫캐 3마리랑 붙었을 텐데 저 정도의 태도면 이긴 거라고 했다.
나는 민주가 측은해서 간식으로 아껴 놓았던 쏘세지를 마저 잘라 주었다.
그리고 더 줄 게 없을까 해서 3알밖에 남지 않은 계란을 부쳐서 민주만 창고로 불러들여 주었다.
"먹고 힘내. 잘했어. 그 정도면 잘 한 거야. 다음에는 꼭 이기고 와, 알았지? 갈 때는 혼자 가지 말고 오월이랑 함께 가. 협공하면 더 잘 싸울 수 있잖아."
남편은 수건으로 삐죽하게 서로 엉긴 털을 닦아 주면서 지고 들어 온 아이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어제 저녁 마트에 갔다가 떨어진 계란을 생각하고 보통때처럼 10개를 사려는데 남편이 계란 3판을 집어 들고 줄행랑을 친다. 90알이다.
"이거 다 먹이고 힘내서 잘 싸우게 해야지."
김유정 소설 봄봄에 나오는 자기 닭이 싸워 이기게 하려고 고추장을 먹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남자, 쏘세지로도 모자라 계란 3판을 사더니 쇠고기도 사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간 역순.
오늘 아침 민주(호기심 강한? 용맹한? 징표. 어렸을 때 뱀과 싸우다 물린 왼쪽 눈 밑 자국)
간식을 주면 입맛은 다시지만 점잖게 기다릴 줄 아는 녀석들.(작년 12. 7)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노는 게 꼭 데칼코마니같다. (작년 8. 22)
데크에 못 올라와서 굴러 떨어지더니...(작년 7. 22)
동네 산책을 나섰다. 호기심 천국이다. (작년 7. 12)
처음 데려 왔을 때 방안에 반나절 있었던 기억이 포근했던가?
아직도 방안에 들어 오고 싶어서 문앞에서 얼쩡거린다. (작년 7. 7)
요렇게 기다리면 들여보내줄까? (작년 6. 22)
(작년 6. 22)
목욕 후 꿀잠. (작년 6. 17)
따뜻한 물에 씻기고 드라이기로 말려 주고 우유를 줬더니 졸린가보다.
바닥은 전기 담요로 따뜻. (감기가 올까봐)
데려온 첫날 (2018. 6. 16)보일러실에 넣어놨더니 숯검댕이가 되었다.
다음날
"일루와, 씻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