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도깨비한테 홀린 이야기
햇살가득한
2008. 5. 17. 20:33
대학교를 몇년 늦게 들어간 나는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 들어오자 그들과 주로 산엘 다녔다.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여름이었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산과 바다를 헤집고 다닌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긴 A 친구와
경상북도 의성에서 고추밭 밭고랑에서 청춘을 보낸 B친구. 보리를 보고 왜 벼가 밭에서 나느냐고 묻던 서울 토박이 C 와
그리고 이 멤버중 유일하게 여자인 나와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A,B 친구는 설악산을 손바닥 손금보듯 헤집고 다닌 친구인데 유일하게 휴식년제로 입산통제를 하고 있는 대승령 코스만을 못 가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설악산에서 몇 박을 하고 백담사 계곡에서 1박을 하고는 개울을 건너
몰래 잠입하여 대승령 입구에 들어갔다.
개울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등산을 시작했다.
출발시간이 오후 2시였으니 천천히 걷더라도 저녁 6시에는 도착하여 장수대
계곡에서 발 담그고 저녁과 막걸리를 먹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길은 초입부터 없었다.
훼손이 심한 길을 막아 보존을 하기 위해 몇 년 동안 통제를 했기 때문에 수풀과 잡목이 자라서 길을 덮고 있었다.
우리는 키만큼 자란 수풀을 헤치며 걷기도 하고 더덕 냄새를 맡고는 붉은 더덕을 캐
저녁 때 고추장을 발라 더덕 구이를 해 먹자고 하면서 비닐봉지에 넣어 배낭에 매달았다.
몇년 막혀 있던 길이라 이정표도 없었고 때문에 샘물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입에서 떴던 물도 바닥이 났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장수대라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끝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저녁때가 되었고 우리는 그제서야 조금씩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빈 사이다 캔을 발견하고는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지나갔다는 흔적이었으므로.
드디어 밤이 오고야 말았다.
길도 없는데다가 산 속이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앞 사람과 두어 걸음을 사이에 두고 바짝 �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물은 떨어지고 비상식량도 바닥이 나 버렸다.
텐트를 칠 수도 없었다.
탈수증과 체온저하증으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맨 앞과 뒤는 시골 출신인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A와 B가 서고 중간에 C와 내가 일렬로 걸어 갔다.
꽤 늦은 시간이었나보다.
뒤에서 두 번째 서 가던 나는 우리 네 명의 발자국 소리 외에 다른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사각, 사각"
깊은 산 속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릴리는 만무했다.
나는 머리가 쭈뼛서고 다리가 얼어 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소리를 지르면 모르던 다른 친구들도 놀랄 것 같아 태연한 척 걸었지만
누군가 순간 내 목덜미를 덥썩 물 것 같아 진땀이 흘렀고 온옴은 얼어붙을 듯 소름이 돋았다.
약 30분 정도는 따라 오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 숨 돌렸을 무렵 문제가 발생했다.
서울 토박이인 C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이 얼어붙어 걸음을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는 더 이상은 못 가겠으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했다.
B친구가 쌍욕을 해대며 내려갈 것을 권했지만 철퍼덕 주저앉은 C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려움이 처했을 때 더욱 냉정해지는 나는 체온유지와 나뭇가지에 긁히는 것을 막기위해 일단 반바지 위에 긴바지를 덧입었다.
그리고는 C에게도 권했으나 C는 바지를 덧입을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었다.
체격으로 보면 한 운동 쯤 했을 C 는 그 큰 몸을 널부러뜨리며 점점 포기상태로 들어갔다.
나는 C의 학번이 나보다 위였기 때문에 선배라는 호칭을 깍듯이 써서 선배의 대접을 해 줬는데 여기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쌍욕을 해 댔다.
후배한테, 그것도 여자한테 그런 욕을 먹고는 자극을 받아서 추스려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역시 효과는 있었다.
자리에서 밍기적거리며 일어나길래
B가 뒤에서 C를 밀면 산 아래로 구르기도 하고 미끄러져 가면 앞서 있던 A가 받아서 제어를 했다.
그리고 A는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길을 커다란 돌멩이를 굴려 귀를 기울여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돌이 구르다가 순간 멈추면 낭떠러지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A가 여러방향으로 돌을 굴려 방향을 잡으면 그렇게 밀고 미끄러지며 A를 따라 갔다.
나는 여기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C 그 친구는 서울 토박이인데다가 흔히 말하는 방위를 갔다 온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옮겨 놓으며 걷다가 순간 미끄러지면 돌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 자신인양
오싹해 지는 경험도 하였다.
설악산에서 몇 박을 하는 동안에 손전등 배터리는 이미 떨어졌고 또 마지막 날인데다가
저녁 전에 도착할 예정이라 새로 배터리 준비를 하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목은 말라 가고 춥기는 하고 길은 보이지 않고...
저 쪽 멀리서 희미한 빛을 띄는 게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달빛에 반사한 계곡이라 생각했다.
일단 아래로 가기 위해 우리는 목적지를 그곳 물을 보며 걷기로 했다.
여전히 A는 돌을 굴리고 B는 C를 밀고 나도 기진맥진하여 걷고...
마침내 절벽같은 곳을 내려와 물가로 왔다.
그 때가 새벽 3시 반.
4시간의 거리를 무려 13시간 반이나 헤맨 것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지에서 살아온 친구들과 악수를 나눴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텐트를 칠 여유도 없이 돌멩이 위에서 텐트를 덮고 새우잠을 잤다.
그 날 아침이었다.
웬지 주변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잠을 깬 곳은 전날 라면을 끓여 먹었던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다.
또 우리가 굴러 내려온 산을 보니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내려 올 수 없는,
마치 고대 설화 헌화가에 나오는 꽃이 핀 기암절벽이 연상되었다.
짐을 꾸려 계곡을 따라 내려 와 등산로를 걷는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수고하십니다"라는 말 대신에
"도깨비 조심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등산로 입구에 붙여놓은 등산 안내도에는 우리가 걸었던 능선은 이리 저리 짚어봐도 짚이지 않았다.
우리는 대승령 등반을 실패하고 등산로 입구에 있는 막걸리집에 자리를 잡았다.
"햐, 얼마나 목이 마르던지. 난 거기서 못 내려오면 탈수증으로 죽을 거 같았다. 솔잎 씹어 먹으며 걸었다."
고 B가 말했다.
"너 알어? 우리가 걷고 있는데 누가 �아오고 있는거."
내가 이 말을 하자 B 친구가
"너두 들었어?"한다.
A, C 친구 역시 너희들도 들었냐고 묻는다.
"난 나만 들었는줄 알았는데. 얘기하면 무서워할까봐..."
그러나 3명의 친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짐승이었을 거야. 발자국 소리로 봐서 제법 큰 짐승이던데."
또 앞서갔던 A 친구는
"너희들 그거 모르지? 난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큰 소나무에 우비가 걸려 있는데
달빛을 받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거야. 꼭 목 매단 사람 같더라구.
너희들 놀랠까봐 끌어 내려서 버렸다."
그 상황이 실감나게 연상되어 듣고 있던 우리는 또 한 번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C의 다리를 보았다. 내내 갈아 입지 못하고 반바지차림으로 다닌 C의 허벅지, 종아리는
맨살보다 상처난 살이 더 많을 정도로 긁히고 찢겨 있었다.
그제서야 더덕을 찾아 보았지만 더덕은 냄새의 흔적조차 남지 않고 돗자리,
물통 등 매달고 다니던 것 모두가 어느새 잃어버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우리는 막걸리 잔을 들어 막걸리처럼 진한 우정을 들이마셨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 걸죽하고 진한 막걸리처럼 진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여름이었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산과 바다를 헤집고 다닌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긴 A 친구와
경상북도 의성에서 고추밭 밭고랑에서 청춘을 보낸 B친구. 보리를 보고 왜 벼가 밭에서 나느냐고 묻던 서울 토박이 C 와
그리고 이 멤버중 유일하게 여자인 나와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A,B 친구는 설악산을 손바닥 손금보듯 헤집고 다닌 친구인데 유일하게 휴식년제로 입산통제를 하고 있는 대승령 코스만을 못 가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설악산에서 몇 박을 하고 백담사 계곡에서 1박을 하고는 개울을 건너
몰래 잠입하여 대승령 입구에 들어갔다.
개울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등산을 시작했다.
출발시간이 오후 2시였으니 천천히 걷더라도 저녁 6시에는 도착하여 장수대
계곡에서 발 담그고 저녁과 막걸리를 먹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길은 초입부터 없었다.
훼손이 심한 길을 막아 보존을 하기 위해 몇 년 동안 통제를 했기 때문에 수풀과 잡목이 자라서 길을 덮고 있었다.
우리는 키만큼 자란 수풀을 헤치며 걷기도 하고 더덕 냄새를 맡고는 붉은 더덕을 캐
저녁 때 고추장을 발라 더덕 구이를 해 먹자고 하면서 비닐봉지에 넣어 배낭에 매달았다.
몇년 막혀 있던 길이라 이정표도 없었고 때문에 샘물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입에서 떴던 물도 바닥이 났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장수대라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끝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저녁때가 되었고 우리는 그제서야 조금씩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빈 사이다 캔을 발견하고는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지나갔다는 흔적이었으므로.
드디어 밤이 오고야 말았다.
길도 없는데다가 산 속이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앞 사람과 두어 걸음을 사이에 두고 바짝 �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물은 떨어지고 비상식량도 바닥이 나 버렸다.
텐트를 칠 수도 없었다.
탈수증과 체온저하증으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맨 앞과 뒤는 시골 출신인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A와 B가 서고 중간에 C와 내가 일렬로 걸어 갔다.
꽤 늦은 시간이었나보다.
뒤에서 두 번째 서 가던 나는 우리 네 명의 발자국 소리 외에 다른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사각, 사각"
깊은 산 속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릴리는 만무했다.
나는 머리가 쭈뼛서고 다리가 얼어 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소리를 지르면 모르던 다른 친구들도 놀랄 것 같아 태연한 척 걸었지만
누군가 순간 내 목덜미를 덥썩 물 것 같아 진땀이 흘렀고 온옴은 얼어붙을 듯 소름이 돋았다.
약 30분 정도는 따라 오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 숨 돌렸을 무렵 문제가 발생했다.
서울 토박이인 C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이 얼어붙어 걸음을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는 더 이상은 못 가겠으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했다.
B친구가 쌍욕을 해대며 내려갈 것을 권했지만 철퍼덕 주저앉은 C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려움이 처했을 때 더욱 냉정해지는 나는 체온유지와 나뭇가지에 긁히는 것을 막기위해 일단 반바지 위에 긴바지를 덧입었다.
그리고는 C에게도 권했으나 C는 바지를 덧입을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었다.
체격으로 보면 한 운동 쯤 했을 C 는 그 큰 몸을 널부러뜨리며 점점 포기상태로 들어갔다.
나는 C의 학번이 나보다 위였기 때문에 선배라는 호칭을 깍듯이 써서 선배의 대접을 해 줬는데 여기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쌍욕을 해 댔다.
후배한테, 그것도 여자한테 그런 욕을 먹고는 자극을 받아서 추스려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역시 효과는 있었다.
자리에서 밍기적거리며 일어나길래
B가 뒤에서 C를 밀면 산 아래로 구르기도 하고 미끄러져 가면 앞서 있던 A가 받아서 제어를 했다.
그리고 A는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길을 커다란 돌멩이를 굴려 귀를 기울여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돌이 구르다가 순간 멈추면 낭떠러지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A가 여러방향으로 돌을 굴려 방향을 잡으면 그렇게 밀고 미끄러지며 A를 따라 갔다.
나는 여기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C 그 친구는 서울 토박이인데다가 흔히 말하는 방위를 갔다 온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옮겨 놓으며 걷다가 순간 미끄러지면 돌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 자신인양
오싹해 지는 경험도 하였다.
설악산에서 몇 박을 하는 동안에 손전등 배터리는 이미 떨어졌고 또 마지막 날인데다가
저녁 전에 도착할 예정이라 새로 배터리 준비를 하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목은 말라 가고 춥기는 하고 길은 보이지 않고...
저 쪽 멀리서 희미한 빛을 띄는 게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달빛에 반사한 계곡이라 생각했다.
일단 아래로 가기 위해 우리는 목적지를 그곳 물을 보며 걷기로 했다.
여전히 A는 돌을 굴리고 B는 C를 밀고 나도 기진맥진하여 걷고...
마침내 절벽같은 곳을 내려와 물가로 왔다.
그 때가 새벽 3시 반.
4시간의 거리를 무려 13시간 반이나 헤맨 것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지에서 살아온 친구들과 악수를 나눴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텐트를 칠 여유도 없이 돌멩이 위에서 텐트를 덮고 새우잠을 잤다.
그 날 아침이었다.
웬지 주변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잠을 깬 곳은 전날 라면을 끓여 먹었던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다.
또 우리가 굴러 내려온 산을 보니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내려 올 수 없는,
마치 고대 설화 헌화가에 나오는 꽃이 핀 기암절벽이 연상되었다.
짐을 꾸려 계곡을 따라 내려 와 등산로를 걷는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수고하십니다"라는 말 대신에
"도깨비 조심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등산로 입구에 붙여놓은 등산 안내도에는 우리가 걸었던 능선은 이리 저리 짚어봐도 짚이지 않았다.
우리는 대승령 등반을 실패하고 등산로 입구에 있는 막걸리집에 자리를 잡았다.
"햐, 얼마나 목이 마르던지. 난 거기서 못 내려오면 탈수증으로 죽을 거 같았다. 솔잎 씹어 먹으며 걸었다."
고 B가 말했다.
"너 알어? 우리가 걷고 있는데 누가 �아오고 있는거."
내가 이 말을 하자 B 친구가
"너두 들었어?"한다.
A, C 친구 역시 너희들도 들었냐고 묻는다.
"난 나만 들었는줄 알았는데. 얘기하면 무서워할까봐..."
그러나 3명의 친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짐승이었을 거야. 발자국 소리로 봐서 제법 큰 짐승이던데."
또 앞서갔던 A 친구는
"너희들 그거 모르지? 난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큰 소나무에 우비가 걸려 있는데
달빛을 받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거야. 꼭 목 매단 사람 같더라구.
너희들 놀랠까봐 끌어 내려서 버렸다."
그 상황이 실감나게 연상되어 듣고 있던 우리는 또 한 번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C의 다리를 보았다. 내내 갈아 입지 못하고 반바지차림으로 다닌 C의 허벅지, 종아리는
맨살보다 상처난 살이 더 많을 정도로 긁히고 찢겨 있었다.
그제서야 더덕을 찾아 보았지만 더덕은 냄새의 흔적조차 남지 않고 돗자리,
물통 등 매달고 다니던 것 모두가 어느새 잃어버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우리는 막걸리 잔을 들어 막걸리처럼 진한 우정을 들이마셨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 걸죽하고 진한 막걸리처럼 진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