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센타가 오기로 약속된 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지나 있었다.
"언니, 글쎄. 윗집 말야. 애들이 넷이나 된대. 이 좁은 공간에서 여섯 식구가 복작대면서 살고 있더라구."
내가 집에 관한 애착을 보인건 초등학교때부터였다.
아버지는 사랑방에 홀로 주무셨고 언니, 동생을 합해 여섯명이 안방에서 복작대며 살았었다.
언니가 셋이나 되는 바람에 남동생이 있음에도 막내 취급을 받았는데
엄마의 언저리를 맴돌며 기회가 닿으면 엄마 찌찌를 잡아 당기고 치마폭에 얼굴을 묻는 것만으로도 막내 취급을 당해 마땅하였다.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마냥 엄마는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옆에 끼고 주무셨는데
남동생과 나는 늘 엄마 쟁탈전을 치루고서야 잠이 들었다.
"엄마, 나 보고 자."
하면서 천정을 보고 누워있는 엄마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려 놓으면
남동생은 얼른 자기쪽으로 엄마 얼굴을 뺏어 가는 거였다.
나만의 엄마를 차지하고 싶어서 서로 자기쪽으로 엄마를 돌려 놓다가
남동생은 아예 엄마 배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지금은 홍천 양지말 화로구이로 유명해졌지만
내가 태어난 야산 밑의 스레트집은 개울 건너에 홀로 있어서
개울은 나에겐 놀이터였고 사색의 공간이었고 그리고 집을 꿈꾸게 한 장소가 되었다.
햐얗고 둥글넙적한 돌을 모아 바닥을 깔고 미루나무가지를 꺾어와 기둥을 세우고
동글동글한 돌멩이로 벽을 쌓았다.
지붕은 멀쑥하게 자란 쑥을 꺾어다 엮어 이었다.
그리고는 나는 그 공간에 들어가 머리와 허리를 수그린 채 들어 앉아 있곤 했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이웃집 오빠를 생각하며 리코더를 불기도 했고
멱 감아 파래진 입술로 보라색 노란색 줄무늬가 있는 빤쓰를 입고
따뜻하게 달구어진 내 집에 들어가 몸을 다시 데우기도 했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햇볕에 달구어진 돌멩이를 귀에 대고
또다른 돌멩이로 톡톡 쳐서 물을 빼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중2, 느닷없이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방 두개에 일곱식구가 복작거리고 살았다.
고 1때 집을 사서 이사를 갔지만 전세를 안고 사서
우리는 여전히 방 두 칸에 곁방살이를 해야 했다.
열등감을 느끼는 건 전학 온 우리반 아이가 하필이면 우리 집 안방에 산다는 거였다.
거실을 거쳐야 조카들이 있는 올케 방으로 갈 수 있었는데
거실에는 우리반 아이가 이따금씩 피아노를 치고 있거나 겨울에 참외를 먹고 있었다.
난 집 구석 어딘가 내 몸 하나 들어갈 아지트(?)를 만들고 싶었다.
대문 위 장독대도 눈여겨 봤고
옥상에 좁은 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도 궁리하였지만 그만 궁리에서 그쳐 버렸다.
자취생활을 하느라 보따리에서 시작한 내 짐은
이제는 일톤 용달로 불어 났고
한참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세어야만 기억이 되는 이사짐을 쌌던 횟수와
성남, 강릉, 대구, 서산, 파주, 이천, 안양....... 살았던 장소도 가히 전국구였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의 시가 아니더라도
난 햇살이 비추는 남향이 홀로 사는 우울함을 어느정도 날려버린다고 자부했다.
그러던 중 동남향의 집을 발견했고
햇살가득한이라는 문패를 하나 새겼고
어제 그 햇살가득한집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굳이 도시를 버리고 촌으로 이사를 한 건
빨래줄에서 하얗게 나풀거리는 빨래를 널어보고 싶고
코를 싸 쥐며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뒤곁에 던져 뒀다가 거름으로 재생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무를 심어 인간이 아닌 또다른 생명과 친분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나무에게 양분과 애정을 줄 것이고 나무는 나에게 그늘과 열매와 사색을 줄 것이다.
나는 도시의 소비적인 생활을 줄이고 생명을 품고있는 땅을 밟으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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