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섰다.
전국 지도를 펴 놓고 이리 저리 거리를 가늠하며 고려해 봤지만
혼자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그래도 무더위와 싸우며 책상 머리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던 여름과 정리를 할 겸
내일이면 만나게 될 아이들.
한 명 한 명 살뜰하게 챙겨 주지 못했던 걸 뉘우치며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기도 했다.
얼린 물을 한 병 샀다.
"일부러 얼려 놓으셨나봐요."
꼭 장삿속이 아니더라도 푹푹 찌는 한낮 더위에
"금방 데워지잖아요."
라며 건네는 촌아낙의 미소에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핸들 꺾이는 대로 아무데나...
처음엔 충주엘 갈 생각이었다.
지난번 월악산 골짜기에서 산삼을 캤다는 어부의 얘기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서 수첩을 챙겼지만 핸들을 꺾어 양평쪽으로 내달렸다.
번잡하지 않은 소로를 좋아하는 나는
동네 산 아래까지 겨우 이어진 울퉁불퉁 비포장길까지 가고자 했으나 길은
꺾어져 돌아 미지의 세계로 유혹하는 듯 했다.
저 모퉁이까지만.
저 모퉁이까지만.
'길은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어느 시인의 절묘한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그런 길을
돌부리에 쿨럭이며 차를 몬다.
CD에서 흘러나온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내 목청껏 솟아나와 절절히 가슴으로 파고든다.
길은 거기서 끊어지지 않았다.
모퉁이로 유혹하지 않으면 푯말이 유혹하고
푸르른 소나무가 유혹하고
나무에 걸어 둔 나무 이름이 유혹하고...
산은 골짜기를 품었고
골짜기는 길을 품었다.
길은 집을 연결하고
집은 사람을 품는다.
공사차량인듯한 트럭을 몇 대 아슬아슬 비켜주고도
머리를 감춰버린 누런 흙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언제부터였을까
두두두두
헬리콥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음악을 끄고는 창문을 열었다.
두두두두
헬리콥터는 나보다 더 아래에 무슨 물건을 내려 놓고는
저 아래로 날아가 물건을 매달고는 다시 내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처음엔 그저 헬리콥터 소리인줄 알았다.
내 가슴에서도 여리게 두두두두 소리가 난다.
이제는 심장과 헬리콥터 소리가 어우러져 큰 소리를 낸다.
가슴이 뛴다.
한참을 그렇게 헬리콥터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물건을 나르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헬리콥터는 근육질의 잘 생긴 사나이 같았다.
일에 집중하느라 미간에 약간 골이 패이고
근육을 부풀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나이.
그 사나이가 내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들으며
차를 기우뚱거리며 산에서 내려간다.
헬리콥터는 나보다 먼저 아래 공터에 내려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 끝에 사뿐히 내려앉은 잠자리처럼.
나는 그 곁을 지나며 돌아가지 않는 프로펠러를 보았다.
원처럼 한 개가 도는 듯 보이다가 멈췄을 때는 세 개로 보이는
그래서 불거졌던 근육에 힘이 빠진 사나이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