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이루고 싶은 꿈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
며칠전 존 고다드의 동영상을 보면서 얼음 냉수를 마신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보고 싶은 웬만한 건 다 해 보며 살았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아직도 줄줄이 적어 내려 갈 게 많았다.
그래, 얘들아, 우리도 꿈을 적어보자.
3학년인 우리반 민우.
유엔 사무총장이 되겠다는 녀석의 꿈은 구체적이다.
유명인사 만나보기, 기부 해 보기 등등
실제로 존 고다드의 책을 내게 빌려주기까지 한 걸보니 녀석은 그런 쪽의 책을 진작에 읽고 있었던 듯 싶다.
"민우야, 조만간 태안에 걷기를 갈 건데 너도 갈래?"
녀석에겐 도전정신, 인내심, 사람들과의 만남 등이 꼭 필요할 것 같았고 힘든 뙤약볕의 도보를 통하여 해냈다는 자신감을 갖는다면 꿈을 이뤄나가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될 것 같았다.
녀석은 바로 대답을 했고 엄마 허락도 받았다.
내가 다른 약속이 있어서 고민하는 사이에 송금도 시켜 버렸다. 너 때문이라도 가야겠구나.
태안 도보. 이른아침 녀석은 엄마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따라 나선다.
버스에 앉은 녀석의 표정을 보니 좀 굳어 있어서 괜히 따라 왔나 이런 생각을 가질까봐
"오늘 컨디션 어떠니?"
했더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든다.
아, 좀 긴장해서 그런 거였구나. 나도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며 나도 좋다고 해 줬다.
다행히도 엄마를 따라 온 6학년 호준이와 죽이 잘 맞아 걷는다.
마치 친 형제처럼.
녀석의 가방이 무거운지 벗었다가 머리에 이였다가 한다.
좀 덜어 줄까 하는데 그래도 형이라고 호준이가 도시락을 자기 가방에 넣는다.
호준이도 막내로 동생을 챙길 일이 별로 없었을 텐데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민우의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다.
목요일 태안 도보가 걱정이 되어 의욕만 앞서면 안 되므로 남한산성을 아이들 5명과 함께 걸었다. 1시간 좀 넘게 걷고 치킨집엘 갔다. 깍두기 무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여기서는 무 추가 값을 받네."
했더니 그동안 한 개도 먹지 않던 민우가 무를 허겁지겁 다 먹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야, 무 추가면 돈 더 내야 하잖아. 아껴 먹어야지."
했는데 말이다.
하여튼 그러던 녀석이 사탕을 꺼내 호준이에게 권하기도 하고 돌아오는 휴게소에서는 형에게 간식을 사 주기도 했다.
무거운 도시락도 들어주고, 같이 말동무도 해 주고 받아주는 형 호준이가 정말로 고마웠었나보다.
민우야, 오늘 너를 데려 온 두 번째 이유가 해결 되었구나.
민우는 그렇게 사람들 틈에 섞여서 잘 걸었다.
바닷가에서 아기게도 한 마리 잡고.
개척자마냥, 저런 포즈도 잡고 말이다.
"이건 지팡이로 쓸까요?"
하고 물었지만 녀석이 들고 있는 건 낚시대 맨 끝쪽 손가락 굵기조차도 안되는 거였다.
다시 게를 놓아주러 물가로 가고.
이번엔 산도 오르고
내리막길도 내려가고
녀석이 먹던 도시락에 숟가락을 걸쳐 놓고
호준이와 바다로 놀러 간 사이
나는 펜션 구석구석을 돌며 꽃을 만났다.
민우의 꿈이 유엔사무총장이라면
난 당장 내년에 귀촌을 하여 이런 꽃 키우며 작은 수목원 하는 게 꿈.
사장님을 졸라 선인장 한 개도 얻어 왔다.
노란꽃이 피는 선인장이 내 정원 어디선가 환하게 피어 있을 그 날을 상상하며.
깨진 항아리조차 모으고 있어서 항아리를 세어보니 얼추 25개 정도.
일부는 된장, 고추장이 담겨 있고
효소를 담은 항아리 몇 개와
금이 간 빈 항아리는 이사가면 꽃을 심을 예정.
아이들 웃음같은 이런 환한 꽃도 심고
돌틈으로는 이런 송엽국도 심고
송충이 같은 선인장도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운다는 것에도 감탄하면서 그리 살아야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걷기.
오늘 뙤약볕의 하이라이트, 모래언덕 걷기다.
민우가 안 보였다.
나중에 저쪽에 있다고 해서 봤더니
아랫도리까지 다 젖도록 물에 들어가 놀았나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녀석이 안 보이면 걱정이 되어 선두로 달려가고 전화하고.
녀석의 신발을 털어 주면서
바닷물 속에 빠지는 즐거움을 맛 봤으니
모래 들어간 젖은 신발 신는 건 감수해야 한단다.
했더니 당연하다는 듯 신발을 신고 또 팔랑거리며 뛰어간다.
사구로 이어진 길은 햇빛 하나 가려줄 손바닥만한 그늘도 없었지만
한여름의 때 안 된 풋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모래 길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나를 찾아오는 녀석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수목원의 온갖 울창한 나무 사이로
몇몇의 동창들과 함께 들어서는 유엔 사무총장을 맞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