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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강릉으로 가야할 때

햇살가득한 2014. 3. 15. 23:35

대관령 산바람이 동해 바다로 불어 내렸다. 

낯선 강릉이라는 도시에 짐을 푼 지 보름이 되어 간다.

짐을 풀었다고는 하나 새로운 직장에 허둥거리느라 늘 발바닥이 허공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머리가 녹슨 탓도 있겠지만 머리탓만은 아닌 것이 새로운 환경으로 

같은 극이 밀어내듯 뇌에서 튕겨져 나간다.

열일곱 명의 아이들 이름을 일주일동안 외웠다. 

아이들 뿐만인가, 

직원들 명단을 옆에 놓고 밥 먹으며 외우고 어제는 자신있게 실무사에게 아무개 맞죠? 내가 열심히 외웠어요 했는데 이런, 옆에 나란히 앉은 실무사 두 명의 이름과 인물을 바꿔 외운 거다. 

하여튼 외울 일도 많고 처리할 일도 많고 안면을 틀 일도 많다.  

그래도 일요일을 두 번째 보낸다고 여유가 좀 생겼다.

오늘은 강릉 바우길을 좀 걸어보자.

 

길은 예전부터 그렇게 있었는데 내가 무슨 감춰둔 보물을 보여주듯 안내하면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으로 덩달아 나도 행복해 지는 깃발들기.  

그런 생각에 조만간 깃발을 들리라 하면서 밥 먹을 곳, 화장실 갈 곳 등을 꼼꼼히 챙긴다. 

 

산소 한켠에 마련된 정자, 20여명 둘러 앉아 멀리 대관령 흰눈을 알프스라고 생각하며 밥을 먹어도 행복할 곳.

 

인터넷 까페에서 만난지 10년이 좀 안 되는 주문진에 사는 분과 같이 길을 시작했다. 

 

 

향호리 저수지를 지나고,

볕 좋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간식을 먹어도 좋을 자리.

잔잔한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시빗거리에 출렁거렸던 마음도 잔잔해 질 때까지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산동백은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양지바른 논에서는 입 떨어진 개구리들이 와글와글 생음악을 깔아주고

햇빛은 창백해진 광대뼈 위를 건강하게 그을려 준다. 

바람은 또 어떻구? 저수지 수면을 한 번씩 손바닥으로 쓸 듯 만져주고 지나갔다.

 

 

 

흙 묻은 발자국이 눈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어제나 오늘 지나간 듯한 큰 멧돼지 발자국들이 나 있다. 

 

어미 멧돼지는 눈길을 따라 먹이를 찾다가 물가 옆 칡 덩굴을 파헤쳐서 새끼들을 불러 모았나보다. 

파뒤집은 흙이 겉만 살짝 마른 것으로 보아 간밤이거나 적어도 오늘 아침에 파 놓은 것이다.

녀석들은 칡뿌리를 캐서 씹다가 국물만 빨아 먹고 섬유질은 곳곳에 뱉어 놓았다. 

나는 녀석들이 먹다 만 이빨 자국이 나 있는 칡 뿌리를 호미질 한 번 안 하고 거두어 왔다. 

녀석들, 내가 팔이 아파서 물리치료 다니는 줄 어떻게 알고는... 

잘 씻어 쪽쪽 찢어 말렸다가 칡차를 끓여 먹어야겠다.

 

오리나무는 묵은 열매 위로 새 열매가 열고 있었다.

 

 

마음이 볶인다면 물가에 텐트를 치고 며칠 자연인이 돼 봐도 좋을 곳이다.

 

 

 

몇 백 마리의 청둥오리떼가 수면 위로 날아갔다가 우리가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다시 돌아와 헤엄을 치고 있다.  

 

솔방울 주워다 불 피우면 이쁘게 잘 타는데... 삼겹살 구우면 솔향도 배고.

 

어느 집이건 마음의 창 한 겹 열고 들여다보면

아픈 상처 하나쯤은 안고 사는 게 인생살이건만,

손수건 펴 놓고 오미자와인 마셔가며 인생 얘길 참 많이도 풀어 놓았다.

 

 

낯선 길은 유혹하듯 펼쳐져 있다면 이곳은 처음 오는 길이지만 낮고 내가 사는 동네라 마음의 거리가 그만큼 가깝다는 것일까? 유혹의 길이 아닌 계속 소나무가 양 옆에서 맞아 줄 것 같은 그런 길.

왜 강릉으로 갔냐고 묻는다면

가야할 때가 됐고, 바다, 산 그리고 소나무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강릉 바우 13길은 세 번의 물과 만난다.

넓은 바다를 보고 심호흡을 한 뒤에 걷기 시작해서 향호를 지나고, 향호저수지를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더니 양지바른 곳에서는 이른 꽃이 피고

팝콘 터지듯 매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늘 바람은 대관령에서 내려왔지만

내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이어질지 강릉에서 바람을 맞으며 겪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