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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부재

햇살가득한 2016. 2. 13. 14:25

병석에 누워 있는 자기 부모를 하루 빨리 돌아가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었다. 내가 그랬고, 24시간 간병하던 큰언니, 90넘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장남의 처로 살고 있는 둘째 언니가 시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매일이다시피 병상을 살피던 언니가 그랬다.

나와 단 둘이 살던 엄마는 그전부터 배가 자주 아프다고 했고 그러다가 괜찮다고 하길 반복했다. 병원에 간다고 나섰다가도 괜찮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내 몸뚱아리 병이라도 날까싶어 2년마다 건강검진을 받고 콜록거릴 때 감기약을 지으러 병원문을 들락이면서도 엄마를 본격적으로 검진을 받게 하지는 않았었다. 엄마는 늘 자존심 강하고,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강한 사람이어서 그런 병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었다. 

2013년 1월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여행겸, 어학연수를 위해 상해에 한 달을 가 있는 동안 엄마가 며칠을 혹독하게 아팠다고 들었다. 나 없이 혼자서. 그리고 5월, 결국엔 병명을 알게 되었는데 큰언니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성남으로 왔다. 나는 공기 좋은데서 요양 하시라고 정기인사가 있는 다음해 3월 1일자로 강릉으로 전출을 받았지만 같이 가겠다던 엄마는 막상 전출이 나자 30년 이상 정붙이고 살던 성남을 떠나길 싫어하셨다. 

엄마를 봉양하겠다고 강릉으로 갔지만 결과적으로는 병든 엄마를 큰언니한테 맡겨 놓고 도망친 꼴이 돼 버렸다.

2015년 12월 11일 수업중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늘 다니던 큰 병원에서는 치료를 안할 거면 작은 병원으로 가시라고 하였고 엄마는 죽음을 수용해야 하는 작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치료약이라는 건 쓰지도 않고 오로지 고통을 줄이는 몰핀 약의 양만 늘려 가면서, 거기다가 물한모금 넘기지도 못하는 이에게 그래도 살아 있으라고 달아준 파란색 영양제를 떼어버리자고 형제들끼리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간밤에 다시 응급실 큰병원으로 옮겼을 때도 수혈조차 받지 못하고 다시 작은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학교개학이 다가오고 5일을 출근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았는데 토요일 올라온지 두 시간 반만에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방학하는 동안 효도를 받고 싶어하셨나보다고 남들은 위로를 하지만 그렇다면 효도를 받자고 그 심한 고통과 맞바꾼 엄마한테 너무나 죄스런 일이다.

엄마는 구리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옮겼고 설날이 껴서 5일장으로 10일에 발인을 하였다. 성지처럼 만들어 놓은 선산에 엄마의 하얀 꽃관이 상여꾼의 어설픈 소리에 맞춰 섰다가 멈추길 반복하면서 아버지 묘 앞에 내려 놓였다.

성당의 형제들께서 천주교식으로 장례행사를 마치고 돌아오고 큰언니와 나는 엄마의 흔적을 커다란 비닐봉투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리고 어제 빗속에 삼우제를 지내고 큰일에 속보인 사람들에게 또다른 상처를 받으며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