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31 (일) 사람들은 왜 인도로 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인도로 몰려가는 것일까?
붓다, 이슬람, 힌디, 간디?
"넌 인도 가지 마. 가서 안 돌아올 여자야."
라는 말을 몇 년전에 들은 게 몸 속 어느 구석인가 남아 있었는지
누가 간다는 말에 덩달아 인도를 가기로 했다.
당장 내일 떠나건만 뭔 준비 하나 하지 않고 비행기표만 달랑 끊어 놓고 앉아 있는 게 누가 밥이라도 떠 먹여 줄 것 같은 그런 심정으로 짐을 쌌다.
아니 뭐 굳이 준비라고 친다면야 중국사는 친구를 통해 고산증에 좋다는 "홍경천"을 몇 갑 구했고 말라리아 약을 샀고 그리고 장티푸스 주사를 맞았다는 것.
여정도 잡지 않았다. 가서 정하자는 이 생각이 참 낙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되면서도 가이드북이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한 지가 오래 되어서-엄밀히 말하면 배낭여행은 처음인지라-말 그대로 인도에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트북 뚜껑에 나의 신상에 관한 걸 모두 적어 놓고 보니 종잇장 한 바닥이다.
컴퓨터 부팅 비밀번호부터 시작해서 내 보험관계, 통장 목록, 누구 꿔주고 못 받은 돈, 또 엄마한테 드릴 돈, 비행기편, 나의 이 메일 주소 등등.
유서 쓰는 기분이 이런 걸까?
28리터짜리 배낭을 땡땡하게 채우고 손톱을 깎았다. 여행은 눈썹마저 떼어 놓고 간다지만 난 손톱깎기의 무게마저도 사양하고 싶었다.
110801 (월) 홍콩 공항에서 걷기
성남 모란에서 공항 리무진을 탔는데 출발하면서 접촉사고가 나서 차를 바꿔 타야 했다.
먼길 떠나는 데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것으로 액땜이라 생각했다.
홍콩에 도착하니 12시. 밤 10시 45분 비행기니 앞으로 10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홍콩 거리를 구경할까도 했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공항에 있기로 했다.
비행기 모양, 혹은 "옷" 字 모양의 홍콩 비행장을 가장자리 따라 걸었다. "나를 찾아 길 떠나는 도보여행"까페에 긴급 번개라도 장난삼아 올릴까 하다가 나 혼자 번개치고 나 혼자 걷는다. 게이트를 돌며 여러 나라 이름을 한 번씩 읽어 보면서. 3바퀴를 도니 3시간이 소요된다.
110802 (화) 인도 델리
현지시간 오전 1시 40분 뉴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외국에서 귀국차 여행을 하는 ㅁ이 마중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여행자거리인 빠하르간지로 왔는데 거리의 쓰레기와 어슬렁거리는 개들은 과연 여행을 잘 할 수 있을 까 하는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인도방랑기"라는 한국인 식당에서 여행 정보를 얻을 겸 아침을 먹었다.
메트로(전철)을 타고 붉은 성(red fort)을 갔다. 인도방랑기에 들러 여행정보를 얻길 잘했다. 권고대로 짐을 맡기고 왔으니 말이지 하마터면 짐을 몽땅 꺼내 검사를 받다가 지쳐 되돌아 오는 일이 생길 뻔했다. 심지어 크지도 않은 카메라집까지 뒤진다. 전철 뿐만 아니라 성 입구 들어가는 곳. 하여튼 여러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붉은 성>
붉은 성(인도말로 랄 낄라)은 무굴의 황제이자 건축광이었던 샤 자한이 공들여 지은 성이란다. 타지마할, 샤자하나바드의 건설, 아그라 성 등을 건축, 증축하지만 국고 고갈의 불만을 품었던 아들에 의해 왕위를 잃고 아그라 성에 유폐됐다고 한다.
세계 1차 대전에 참가했던 인도군인들을 위한 위령탑인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를 갔다.
푹푹 찌는 날씨, 지저분한 거리, 끊임없이 쫓아오는 물건파는 사람, 사이클 릭샤, 오토 릭샤와 뒤섞이는 인파들. 정신줄 놓았다가는 자동차 바퀴가 내 발등을 지나갈지도 모른다.
신호등도 없었고 그나마 있는 횡단보도를 따라 걸으면 막혀 있어서 돌아가기 일쑤인 거리를 교묘하게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 나가야 길 건너는 데 성공이다. 온통 소음과 매캐한 공기를 손수건으로 가리며 말이다.
저녁때는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에어콘이 없는 현지인과 같은 등급의 침대칸을.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가 창가에 머리를 놓은 내 목을 밟고 지나가는 듯 달려오고 파괴신 시바신과 맞장이라도 뜰 참인지 소리 또한 머릿속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인도의 습관을 따르고자 하나 뒤를 본 뒤 왼손으로 처리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기차간의 화장실에 놓인 작은 바가지 하나는 그냥 물을 내려보내는 용도로밖에 쓰지 않았다.
110803 (수) 영혼을 보내는 곳, 바라나시
성지라 불리우는 강, 갠지스 강가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얼마 안 남은 운명을 안고 인도 사람들은 이곳 갠지스강가로 몰려온다.
<바라나시로 가는 오토릭샤 안에서>
유학생부부가 운영한다는 까페를 찾아갔으나 그들은 출타중이었고 그들이 눌러 살만큼의 인도에 대한 강한 흡인력을 여행기간중에 느껴보리라 생각했다.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시체가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종을 울리며 꽃상여가 지나가면 신발을 채 벗지도 못하고 방으로 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귀를 틀어 막고 있던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도 가슴이 쿵당거려서 외면하고 서 있는데 인도인이 내게 "괜찮아요. 괜찮아요. 두려움은 마음에 있는 거예요."하는 소리를 한다. 그래요. 나는 아직 내가 만들어 놓은 담을 허물지 못해요. 언제쯤 나도 한 사람의 육신이 떠나가는 것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한채 화장을 지켜볼 수 있을까요?
골목을 지나며 한 번 더 죽은 자의 육신을 맞닥뜨렸고 큰 길로 나오자 안심이 되었다.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골목에는 사람들, 소, 개가 서로 비껴 다니고 그들의 배설물은 비에 질펀하게 퍼져 슬리퍼를 타고 내 바지 엉덩이까지 튀어 올랐다.
밤에는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이 제를 지내는 뿌자라는 것을 보았다.
110804 (목) 바라나시
바라나시의 BHU (베나레스 힌두대학)에 들렀다가 사원을 구경하고 바라나시역에서 아그라 포트역 가는 기차를 오후 3시경 탔다. 한국에서 2배만 지저분하게 살자고 마음 먹었지만 복잡하고 똥을 밟을까 조심해야 하는 바라나시라는 도시는 영 싫었다. 기차의 같은 침대 칸에서 만난 홀로여행하는 간 큰 한국인 여자는 인도를 두 번째 오는데 바라나시는 최소한 며칠을 묵어야 오묘한 끌림이 있다는 거다.
10805 (금) 타지마할
아그라의 아그라 포트역에 내린 시간은 새벽6시였다. 15시간 기차를 탄 셈이다. 밤새탄 기차는 에어콘이 있는 기차로 좀 추웠고 창문을 닫아서 소음이 덜했다. 여행책자를 꼼꼼이 안 읽은 탓에 무슬림의 국경일인 금요일에는 타지마할이 문을 안 연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일단 아그라 성에서 타지마할을 조망했다. 부인의 무덤을 건축한 샤 자한이 아그라 성에서 아들에게 유배당한 채 부인의 무덤을 바라보는 심정을 어땠을까?
<아그라 포트에서 본 타지마할>
릭샤를 타고 타지마할로 갔다. 뒷쪽에 있는 야무나 강가에서 배를 빌어서 담 넘어 순결한 흰빛을 띄고 있는 타지마할을 구경했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아름다운 묘를 남겼지만 한 남자의 욕심으로 무수한 사람이 숨졌을 타지마할.
아그라 칸트역에서 기차를 타고 3시간을 걸려 델리로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버스 터미널(여기서는 버스 스탠드라고 한다)에 가서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마날리 가는 버스를 탔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우리가 있던 빠하르간지에서 출발하는 거였고 우린 바가지를 쓰기도 했다.
거기다가 자리를 이중으로 끊는 바람에 우리는 실갱이가 벌어졌다. 할인을 해 달라고 했고 사장은 그런다고 했지만 차장은 안된다며 돌연 자기 손목시계를 푸는 거다. 졸지에 시계가 생겼다. 휴대폰으로 시계를 썼는데 꺼내기가 불편해서 바라나시에서 하나 살까 하면서 상점에서 만지작거렸었다.
오후 7시 30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110806 (토) 마날리
볼보 버스라고는 하나 이중계약으로 어쩔 수 없이 맨 뒷좌석에 앉았는데 불편한데다 옆에 앉은 젊은이들은 술을 마셔 대는지 온통 시끄러운통에, 고속도로라고 이따금씩 톨게이트 비용을 지불하기는 하나 여기저기 꺼진 도로라 쿨렁 차를 온통 흔들어 대는가 하면 엔진소리를 꿱꿱 내는 통에도 날이 밝았다.
아침 7시. 차가 멈춘다. 아무도 왜 멈췄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내려서 죽 늘어선 차를 따라 200미터쯤 가보니 이런 간밤의 비에 길이 끊어져 있다.
복구되는 동안 마냥 기다리기를 8시간.
저녁때 5시가 되어서 목적지인 마날리에 도착하니 20시간을 온 셈.
올드 마날리 숙소에 방을 잡았다.
110807 (일) 마날리
전나무 숲속을 걸어 바시싯 온천까지 걸어갔다. 사원 안에 있는데 무료이긴하나 무지 더러워서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놓았는데 누가 들고 갈까봐 마음이 안 놓인다. 잃어버리는 게 아깝다기 보다 내 발에 맞게 편안해진 운동화를 잃어버리면 산엘 어떻게 갈까 하는 걱정이 앞선거다. 인도인의 신발사이에 눈에 띄는 내 신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마음이 병을 만들어 내는구나 하는 자책을 한다.
히마찰 문화 박물관과 둥그리 사원을 갔었고 시에서 운영하는 콘도의 정원에서 놀다가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전부터 변이 묽어지는 것이 설사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챙겨간 약은 듣지를 않았다.
저녁때는 3일밤을 묵을 수 있는 돈으로 ㅁ은 송어회를 시켰고 사막에서 회 맛을 못 보았을 ㅁ 생각에 눈 꾹 감고 먹기로 했는데 결국엔 찬 음식이라 그런지 배탈이 났다. 또 ㅁ은 술 기운 때문이었는지 언성을 높였고 나는 여러 한국 사람들 속에서 더는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고 말았다.
<둥그리 사원 앞에서>
110808 (월) 마날리
나는 짐을 챙겨 숙소를 옮겼다. 그래, 너 없어도 나 여행 잘 할 거다. 그동안 너의 그 끊임없는 수다에 내가 수도하는 심정으로 다닌 거 알기나 하니? 나도 여행하며 생각 좀 하자고.
ㅁ도 설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운이 없으면 좀 조용하게 다닐 것 같으므로. 쉴 때나 걸을 때나 끊임없이 말을 했는데 그는 아마도 떠오르는 생각들을 머리에 담아 두지 않고 내가 먹으면 위와 장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설사하듯 그렇게 말로 뱉어내었다. 이번 인도 여행은 묵언수행하듯 말을 아껴 조용히 생각하며 다닐 거라고 눈치를 주었건만 ㅁ은 자기가 말 하는 걸 왜 안들어 주냐고 짜증을 내었다. 어떤 이야깃거리에서 시작하는데 그걸 내가 못 알아들을 까봐 예를 들고 하다보면 처음 주제와 엉뚱하게 빗나가버리는 ㅁ의 대화를 번번히 들어 줄 수도 없었다.
델리에서 혼자 여행하는 여자를 보고 성격이 강해서, 좀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성격이 모나서 남과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ㅁ과 다녀보니 그들이 이해가 되면서 김선생의 관조하듯 울릉도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조용함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물론 ㅁ의 수다가 항상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몇살이냐, 가족은 몇이냐, 어디서 왔느냐, 직업이 무엇이냐 등. 나는 사생활침해라고 생각하여 묻지 않는 것들을 그는 이런 질문들을 통하여 농담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과 친해지고 정보를 얻고, 길을 묻고, 물건 값을 깎곤 했다.
밤새 설사가 계속되어 아침에는 좀 잠잠해져서 된장을 뜨거운 물에 풀어 한 컵 마셨다.
릭샤를 타지 않고 전나무 숲을 가로질러 뉴마날리로 가는 중에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녀석으로부터 가슴을 만지켰다. 성질 같아서는 쫓아가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300년도 넘었을 굵은 전나무숲에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멀어져 가는 녀석을 보며 그저 주머니를 털리지 않은 것만이라도 얼마나 다행이냐며 위안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여.
<전나무 숲>
음식물이 들어오자 뱃속은 다시 저항을 했다. 밤새 설사를 하고 입이 말랐다. 밤 11시 밤이 되어 윤 까페 남편과 응급실엘 갔다. 이온음료와 같은 약을 받아와 수시로 마시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110809 (화) 나가르
새벽에 전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하자던 ㅁ이 6시 30분에 왔다. (어제 가슴 사건으로 또 같이 다니기로 했다.) 와보니 애가 헬렐레 한 것을 보고는 죽을 끓여 달라고 주인한테 부탁을 한다.
밥 끓인 것을 먹고는 어제 갔던 병원에 가서 "설사"를 영어로 몰라서 "eating and direct out"이라고 ㅁ이 설명하자 의사 바로 이해한다. 여러 나라 촌 구석을 다닌 ㅁ은 예의갖춘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단어들을 나열하는데도 뜻이 통한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언어는 곧 의사소통이 목적이라고.
"very strong medicine"을 타서 나가르 가는 버스를 탔다. 마날리에서 나가르는 1시간 정도 거리인데 지역의 城이 있는 곳이다. 거기서 대만인 水洪源을 만났다.
찬드라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는데 마날리보다 훨씬 조용해서 마음에 든다. 특히 정원에 해바라기와 나팔꽃 등 한국에서 익숙한 꽃을 보니 마음마저 안정되는 듯 하다.
<개구리 접기 가르쳐 주기>
<금세 몰려든 골목 아이들>
110810 (수) 나가르
어제 먹다 남은 죽과 양배추, 앙파를 데쳐서(기름기가 없게 하려고) 아침으로 조심스레 먹었다. 약을 먹어 그런지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화장지를 준비하고 여차하면 뛰어갈 화장실 생각에 긴장을 하며 러시아 화가의 갤러리에 들렀다. 오는 길에 아채를 좀 사 왔고 ㅁ은 통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 요리를 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ㅁ은 주는 밥만 받아 먹을 줄 아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그런 그가 부엌에서 여주인과 얘길 나누며 북적거리는 걸 보니 뭔가 하긴 하는가보다 싶었다.
다 되었다길래 부엌에 가 보니 이것저것 야채를 넣고 볶았는데 "이거 물이니? 기름이니?" 했더니 "물도 나왔어." 한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 법. 기름을 얼마나 넣었냐니깐 숟가락이 없어서 "쏟아 부었다"고 했다.(인도의 식용유 통은 4리터 쯤 되나보다) 먹어 보라며 한쪽으로 기울인 후라이팬 바닥에 기름이 반 국자 정도 고였다.
다른 야채보다 가장 늦게 익는 감자를 하나 골라 먹었지만 기름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했다. 만들어 준 성의를 무시한다며 ㅁ은 밥그릇 앞에 놓고 화를 냈고 인도인 주인앞에서 무안하리만치 언성을 높였다. 뭐야. 밥그릇 앞에 놓고 싸우는 개새끼들도 아니고. 며칠 전에도 식당에서 밥 먹으며 큰 소리 내길래 목소리 낮추라고 몇 번 이야기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일어나 숙소로 온 적이 있었다. 송어회 먹다가 일어나 나온 날 말이다. 갈라선 이유가 된 그 날.
토끼와 호랑이가 어찌 저찌해서 친구가 되었다. 토끼는 호랑이도 풀을 좋아할거라며 잔뜩 뜯어다가 호랑이 한테 갖다 주었다. 호랑이는 자기가 먹는 고기를 토끼도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동물을 잡아서 토끼 앞에 갖다 주었다고 한다.
8월 1일 출국했으니 꼭 열흘이 되는 이 시점에서 먹은 족족 다 내 보내니 영양 부족으로 눈도 침침한 것이 체력은 바닥나고 감기 조짐까지 보이는데다 동행인과 뜻이 안 맞으니 귀국을 심각히 고려하느라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 비행기표를 바꿔도 되는지 알아 봐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110811 (목) 낄롱
중지 손가락보다 두 배나 더 굵고 길고 시커먼 민달팽이를 피해 걸으며 찬드라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왔다. 이런, 어제 야채를 사면서 우산겸 양산을 놓고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차 시간보다 더 일찍 차가 온다고 해서 다시 되짚어 가지도 못하고 햇볓 쨍쨍 아니면 비가 올 인도 날씨에 양산에 자꾸 미련이 갔다.
1시간 시내버스를 타고 마날리 버스터미널로 왔다. 낄롱가는 버스가 10시에 있다고 하더니 9시 반에 출발한다. 인도에서 출발 시간을 몇 사람에게 물어보고 적정 시간을 판단하여 그보다 30분에서 1시간 일찍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운전사가 10시에 간다고 해 놓고 9시 반에 가는 경우도 있고 10시 반에 가는 경우도 있다. 1분마저도 계산하면서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뛰어다니는 한국인은 운전사 말만 믿고 잠깐 간식이라도 사러 갔다가는 버스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델리에서 레에 가는 방법은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만에 가는 노선이 있고
델리에서 마날리를 15시간 간 뒤(우린 22시간 걸렸지만) 거기서 다시 레까지 20시간을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고 델리에서 스리나가르를 거쳐 가는 방법도 있다.
희말라야에서 고산증을 혹독히 겪은 ㅁ은 며칠이 걸리더라도 적응하면서 육로로 가는 마날리를 경유하는 방법을 택하자고 했다. 노선에 관한 한 난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웬만하면 따르고자 했다.
마날리에서 레를 가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는데 보통 여행자들은 1400루삐를 주고 광광버스를 이용한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다르차"라는 허허 벌판에 있는 텐트에서 잔다고 하는데 사실 추워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거기다가 텐트비 600루삐를 더 지불하고.
우리는 현지버스를 타고 낄롱이라는 곳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3,980m 인 로탕 라를 넘는데 버스는 불과 낭떠러지와 50cm 정도 길 안쪽에서 달린다. 거기다가 비가 와서 질퍽거리는 포장안된 도로를 진흙에 기우뚱할 때는 낭떠러지로 떨어질까봐 가슴이 쿵덕거린다. 내려다보면 면발 굵은 칼국수를 지그재그로 척척 걸쳐 놓은 듯 희뿌옇게 놓여진 길이 아스라히 산 모퉁이로 꼬리를 감추고 있다. 이따금씩 구름이 눈덮인 산과 길을 감춰 주기도 한다.
<길>
창밖으로 내려다보면 천길 낭떠러지 까마득한 길, 이번 여행을 떠날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은데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까지 든다. 실제로 골짜기에 종잇장 구겨지듯 쳐박혀 있는 트럭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차 안을 보면 현지인들은 무표정하게 잠들어 있다. 운전사는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
그래, 내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도 없고, 운전사만 믿고 가자.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가 생각난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떨었는데 그 두려움은 마음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었다고 고등학교 때 얼핏 들은 거 같은 그 생각이 나는 거다.
<발 아래에서 무지개를 본 적이 있는가?>
엉덩이가 짓무르는지 화끈거리기도 하고 허리도 아프고 하여 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낄롱에 도착하니 저녁 5시 반이다. 여기도 고지대 3,349 m 이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잡고 레 가는 버스표를 끊은 뒤 저녁을 먹으러 갔다. 뜨거운 생강 레몬 차가 고산증에 좋다길래 꿀까지 넣어 몇 잔을 마시고 ㅁ도 내가 먹는 것에 신경이 쓰였는지 기름기없이 조리할 것을 주문했다. 메뉴에도 없는 푹 끓인 밥과 찐 감자로 저녁을 먹었다.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고산증에는 머리를 따뜻하게 해야 하므로 샤워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다. 되도록이면 씻지 않는게 좋다는 것. 책에도 체온 유지를 위해 아기가 목욕을 하고 나면 버터를 발라 준다고 한다.
세수만 하고 잠이 들었다.
110812 (금) 레
버스는 약속시간보다 30분 늦은 새벽 5시 반, 어둠속에서 출발했다. 어제 마날리에서 현지 버스를 타고 올 때는 외국인이 우리 둘 뿐이었는데 레에 가는 버스에는 거의 다가 외국인이다.
여권을 중간중간 검사하기도 하고 하여튼 여전히 초지가 없는 돌과 산으로 이루어진 길을 하염없이 달린다. 고산증에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데 화장실에 자주 가는 나는 물통만 끌어 안은 채 마실 수가 없다. 화장실 간다고 차를 세워도 사방이 다 보이는 휑한 곳이라 앉은키 정도의 돌멩이를 찾아 차를 세워놓고 찾아가는 그 민망함이란..
10시가 조금 넘어 다르차라는 곳에서 차가 멈췄다.
ㅁ이 달(밥에 콩이 섞인 카레를 부은 것)을 두 접시 사 왔다. 내가 비상식으로 몇 숟갈 챙겨간 고추장을 꺼내 놓자 그가 한숟갈 뜬다.
"아껴먹어."
라고 하자 먹지말란다고 하며 화를 낸다. 싸 올 거면 더 가져 와야지 이게 뭐냐며. 난 작년 갈비뼈 사고로 무거운 걸 들지 못한다. 그래서 최소 최소 하다보니 28리터 배낭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것마저도 버거웠다. 가죽 지갑도 무겁고 두꺼워서 천으로 만든 얇은 지갑을 갖고 다녔더니 돈 꺼내는 데 시간이 든다며 성질 내고. 이번에도 밥그릇을 놓고 또 큰 소리가 났다. 왜 우린 정말 먹는 거 앞에 놓고 자꾸 이런 실갱이가 벌어지는 것일까?
통로를 하나 사이에 두고 약간 비낀 옆 자리가 ㅁ 자리이건만 설산 트래킹을 한다는 사람들이 내리고 나니 빈 자리에 ㅁ이 앉았다. 사이가 좋으면 이런 저런 얘기로 감상을 방해하더니 떨어져 가니까 조용해서 좋긴 하다.
몇 시간을 조용히 달렸을까.
4,892m 의 바라라차 라를 비껴 가고 4,253 m의 사추라는 고지를 달린다.
저쪽 자리에서 ㅁ이
"괜찮니?"
하고 물어 온다.
고개만 끄덕끄덕거리며 속으로는
'고산증은 괜찮은데 난 니가 더 힘들거든.'
했더니
"안 괜찮은 거 같은데?"
한다.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고산증에 머리도 멍 한 것이, 기운도 없다.
풀 하나 없는 푸석푸석 마른 들판은 차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뿌연 먼지를 안겨주었고
두건처럼 가린 손수건으로는 뜨거운 것이 흐른다. 설사가 거의 나아갈 즈음 목감기가 시작되었고 가래가 들끓어 열을 동반할까봐 약을 먹었더니 코감기로 전이가 되었다. 그 콧물이 흐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코피였다. 안되겠다싶어 중국 친구가 사다 준 홍경천을 한 알 꺼내 먹었다.
몇 시간을 더 달려 4,630 고지인 팡이라는 곳에서 또 여권 검사를 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길이라는 5,360m의 타그랑 라를 넘었다.
차가 멈추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화장실 찾는 일. 그러나 화장실은 거적떼기만 옮겨다 다른 곳에서 볼일을 보고 싶을 정도인 차마 들어가고 싶지 않는 곳인데 이곳은 가려줄 그 거적떼기 조차 없다. 이번엔 푹 꺼진 곳을 찾아 걸어가는데 술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비비 꼬인다.
새벽 5시 반에 떠나서 다시 날이 어두웠으니 이미 12시간을 더 달린 셈이다. 머리도 아프고 통 맥을 출 수가 없다. 그래도 기운을 차리려고 계란후라이와 맨밥을 주문했으나 한 숟갈도 뜨지 못했다. 먹히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비상식 미숫가루를 생각해 냈다. 뜨거운 물을 달래서 두 컵을 타 마셨다. 같은 버스를 탄 독일인들은 뭘 먹지도 못하고 헬렐레 하는 이 자그마한 동양 여자를 자꾸 걱정해 주었다. 영국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은 뭔 기운이 그리도 좋은지 내가 코피를 쏟는 중에도 여전히 재잘거렸고 저들은 수다 때문에 고산증을 못 느끼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다. 하여튼 체력들은 좋았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었지만 여자들도 자기 키를 넘는 배낭을 지고 다녔고 내 배낭은 그들의 새끼 배낭에 불과했다.
미숫가루를 타 먹고 육포를 조금씩 뜯어 먹으며 여전히 흔들려 간다.
목적지인 레(leh)에 도착한 것은 밤 9시 반이었다. 낄롱에서 부터는 16시간을 험한 산을 넘었고 마날리에서부터는 이틀동안 차를 타고 온 셈이다.
샴푸통을 열어보니 압력 차이로 팽창하여 터져 있었다. 다음에 고지를 갈 때는 공기를 빼고 뚜껑을 닫을 것.
110813 (토) 레
어제는 밤에 도착하느라 숙소를 알아 볼 겨를도 없이 호객군을 따라가 묵었기에 오늘은 직직 게스트 하우스로 짐을 옮겼다. 마당에는 온갖 야채가 푸르게 자라고 사과나무에는 골프공만한 파란 사과와 노란 살구가 달려있어서 정겨웠다.
집 주인에게 숙소를 구할 때 가장 먼저 고려 하는 것이 정원이라고 부추겨 세우며 구한 거였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라는 레에서는 걸음을 빨리 걷거나 말을 빨리 할 수도 없었다.
어제 버스에서 16시간을 덜컹거리며 왔으니 오늘은 특별히 할 일을 만들지 않았다. 시내에 천천히 걸어 나가 심해진 감기에 꿀을 한 병 사고 한국 식당에서 닭볶음탕을 먹었다. 주인인 한국인은 연락 두절이고 인디언 여자와 남동생이 요리를 했다. 생각같아서는 팔을 걷어부치고 들어가 이것 저것을 넣고 가르쳐 주며 요리를 하고 싶다만 꾹 참았다.
야채를 사고 천천히 걸어 오다가 나가르 성에서 만났던 대만인 쉐이홍위엔을 우연히 만났다. 그를 나가르에서 만나던 다음날 우리도 레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었으나 내 몸상태 때문에 하루를 더 묵어서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기게 되었었다.
인도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생긴다. 저녁 9시에 홍위안이 우리 숙소로 오기로 했는데 ㅁ과 내기를 걸었다.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했고 ㅁ은 안 올 것이라고 했다. 지는 사람이 밥 사기. 9시가 다 되어 홍위안이 왔다. 우리 숙소를 물어 물어 어렵게 찾아 왔고 밥도 아직 안 먹었다고 했다. 다음날 트래킹을 가야해서 준비할 게 많다던 그는 약속을 지키려 밥도 먹지 않고 시간을 지켜 온 것이다. 먹는 것에 늘 후한 ㅁ은 아침거리로 준비해 둔 사과파이와 오렌지 쥬스 한 병을 내어 주었다.
110814 (일) 레
늦게 일어나 대대적으로 빨래를 해 널고 고산증과 감기에 좋다는 생강차를 끓였다. 물론 게스트하우스의 부엌에서.
레에서는 특별히 누브라밸리니 판공초니 하는 투어를 하지 않기로 했다. 레에 오는 동안 이미 황갈색의 민둥산을 수없이 봐 왔던 터여서 시내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절만 몇 군데 갔다 오는 걸로 계획을 잡았다.
일본인 절인 산티 스툭파에 가는데 고산증으로 기운이 없다. 그나마 고산증이 다행인 건 희망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이다.
조용조용 절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오후가 되었는데 가게 셔터 문을 내린다. 일요일이라 오후에는 문을 닫는가보다고 생각했다.
여행사를 가서 레에서 델리가는 비행기표를 구하러 갔으나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는 비행기 값은 12,000 루삐, 한국 돈으로 3십만원이나 하는 거다. 제주도 왕복도 이보다는 싸거늘. ㅁ은 돈이 아깝다며 스리나가르를 경유해 가자고 한다. 하지만 거길 가자면 또 하루가 걸릴텐데, 자신이 없긴 했다. 스리나가르는 파키스탄 접경지역이라 위험하다고 가지 말것을 안내책자에서 권고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내 성격과는 달리 ㅁ은 빨리 결정을 내렸고 스리나가르에서 델리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이젠 운명이다. 20만원을 아끼기 위해 또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계획에도 없던 스리나가르를 가야한다. 하루 종일 또 버스에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흔들려가며.
한국 여행자가 들려준 얘기는 어제밤 10시쯤에 레에서 마날리로 가는 버스가 전복되어 15명이 죽고 대여섯명이 다치는 사고가 났다고 했다. 그들은 레에 사는 젊은(10대 후반에서 20대 초, 중반) 가수나 댄서들로 내일 있을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마날리로 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레의 온 도시가 문을 닫고 조의를 표시했고 거리의 사람들은 모여 웅성거렸다. 왕궁에서 내려다보니 2대의 살수차가 마른 공설운동장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 운동장에서 조문을 하려는 것 같았다.
<왕궁>
<왕궁에서 내려다본 레의 중심 도시, 윗쪽 운동장>
110815 (월) 레
아침에 틱세 곰파(절)를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걸어갔다. 홍위안이 아름답다며 꼭 가보라고 한 곳이다. 버스를 타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어디 간다고 얘길 해 놓으면 거기에 다달으면 사람들은 내리라고 자기 일처럼 간섭을 해 준다.
<틱세 곰파>
직직 하우스에 묵은 이유중의 첫째가 나무와 꽃과 야채가 어울어진 정원이었다.
생강차를 끓여서 꿀을 타서 붉은 라다끼 전통옷을 입고 있는 할아버지한테 타 드렸더니 땡큐를 연발하신다. 내 나이 보다 좀 어려 보이는 안주인은 늘상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때가 되면 마당에서 몇몇 야채를 뽑았고 손님들의 전화를 영어로 받았고 방청소도 하느라 늘 종종거렸다. 할아버지보고 시아버지냐고 했더니 brother in low 라고 하는 걸 보니 남편의 형이라는 말인지 하여튼 그 분이랑도 함께 살며 생활하는 집안의 기둥이 되는 그런 똑똑한 여자였다. 듬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편은 영어를 못했지만 내가 부엌에서 얼쩡거리면 나 쓰라고 미소를 띄며 높은데 있는 그릇도 꺼내주고 하얀 도마가 까매서 차마 쓰지 못하고 당근을 베어내고 있는데 수세미로 닦아서 그나마 하얘진 도마를 내밀기도 했다. ㅁ이 주방에 들어오자 술도 한잔 씩 했다.
인도는 전기 상황이 안 좋아서 시도때도 없이 불이 나간다. 창문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한석봉 어머니 떡을 썰듯 야채를 썰어 저녁거리를 준비하는데 할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전등에 불을 켜 주신다.
"줄래줄래"
할아버지가 아는 영어라곤 땡큐가 전부이지만 난 줄래 혹은 줄래줄래가 라다키 언어의 전부였다. 안녕하세요?도 줄래, 고맙다고도 줄래, 하여튼 할아버지만 보면 웃으며 줄래 하고 인사를 했다.
110816 (화) 레
ㅁ, 홍위안, 일본인 다나까와 헤미스를 가기로 했다. 탈 축제로 유명하다는데 그 때는 아니고 그냥 유명한 절이 있다니까 가보는 거다.
절을 둘러 보고 버스를 되짚어 타고 나와 숙소가 있는 레의 여행자 거리로 왔다. 외국인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ㅁ은 수제비, 김치볶음밥, 라면 등을 시켰는데 ㅁ의 그 너스레와 소란스러움에 중국인과 일본인은 재밌는 사람이라며 웃긴다고 했다. 이제 군대를 갔다가 제대하고 9월달이면 응급실 의사로 돌아가야 하는 중국인 홍위안은 과묵한 성격들이 그렇듯 농담을 할 줄 모르고 이따금씩 필요한 말만을 했고 다나까는 폐 끼치지 않으려 조심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냈다.
숙소로 돌아와 "오래된 미래"를 다 읽었다. 우리 나라의 70년대와 아주 흡사한 라다끼의 산업화의 시작 과정을 진술한 책이다. 산업화의 시작으로 환경오염과 공동체 생활이 느슨해짐 등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서술했는데 호지 여사가 우리 나라에 와도 라다크 대신 한국이라는 단어로 바꿔 써도 내용이 자연스레 통할 것 같았다.
110817 (수) 레
레에서는 모두 곰파(절) 여행이다. 아침에 빵을 먹고는(그러고보니 3, 4일 전부터 빵과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대청보사라는 한국절에 갔다. 한국인 스님은 한국에 계시고 현지 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짜이를 얻어 마시고 희망과 스님이 얘기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마당에 있는 코스모스, 사루비아 꽃을 보니 정겹게 느껴진다.
직직 게스트하우스에서 방값 계산을 하고 안주인과 사진을 찍었다. 내 영어가 좀 되었더라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한국의 그 통통한 통배추 씨앗을 보내주겠다고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만 맴돌았다. 백김치 담는 걸 가르쳐 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스
<미션스쿨 아이들>
우리가 전날 끊은 건 분명히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디럭스 버스였는데 그게 곧 현지 버스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super deluxe 라는 여행사 직원의 말도 사실이었으나 디럭스는 커녕 수퍼는 더욱 아닌 말 그대로 시골 버스를 오후 2시에 탔다.
버스는 라마유르를 거쳐 스리나가르로 달렸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좁은 길에서 차가 오면 마냥 기다리며 노쇠된 차의 끽끽거리는 소리를 잠결인지, 피곤결인지 하는 통에 들어가며 산을 넘고 밤을 넘었다.
110818 (목) 스리나가르
어제 오후 두시에 레에서 출발한 버스는 20시간을 달려 오전 10시에 스리나가르 버스 스탠드에 우릴 내려준다. 달 호수의 하우스보트(house boat)에서 짐을 푼 뒤 쪽배를 타고 놀았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정원>
110819 (금) 스리나가르
어디든 과장 광고와 사기는 있는 법. 레의 여행사에서 자기 동생이 하는 하우스보트라며
디럭스 룸 사진을 보여주며 호객행위를 했었는데 그 집이 아니어서 항의를 하니 오늘 그 집으로 옮겨준다.
<우리가 묵은 숙소>
1,300 루삐를 주고 택시를 대절해서 스리나가르 시내 투어를 했다. 정원 탐사 온 연구원들 모양 4개의 정원엘 들렀고 두 개의 이슬람 사원에 들렀다.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밤이 되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도하는 소리가 도시 전체를 울렸다.
<선생님과 학생들>
110820 (토) 델리
홍위안은 트래킹을 떠나고 우리는 체크 아웃을 하고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갔다. 분쟁지역답게 뭔 짐 검사는 그리도 여러번 하는지. 며칠을 걸려 와야 할 스리나가르에서 델리 거리를 단 1시간 30분만에 비행기로 휙 왔다. 역시 델리는 더웠다. 공항 버스를 타고 델리역에 내려 빠하르간지(여행자 거리)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그곳에 일본인 다나까가 있었다.
YMCA 호스텔을 잡았는데 수영복을 안 가져와서 수영을 할 수가 없다. 더운데 풍덩 들어가면 좋겠다만.
110821 (일) 델리
아침에 결국엔 가장 강력하게 ㅁ과 싸웠다. 오늘 밤엔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건만 그동안 눌러 왔던 감정 조절을 못하고는 막바지에 왕창 터지고야 말았다. ㅁ이 짐을 싸서 먼저 나가고 내가 나가고.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더니 ㅁ이 거기에 앉아 빵을 먹고 있다. 빵쪼가리를 씹으며 ㅁ은
"짐 맡기는데도 돈을 내란다."
하는 거다.
"니거랑 같이 맡기자."
는 말도 함께.
"그럼 또 같이 다니자는 얘기?"
하며 웃었다.
"별 수 있냐? 차비를 아끼려면 같이 다녀야지."
어제 평상시처럼 싼 방에 묵자니까 기어코 릭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델리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코넛 플레이스로 오더니 평상시의 4배나 주고는 방을 구한 거다. 지가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점심으로 배, 계란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짐을 맡겼다. 1개당 50루삐 총150 루삐란다. 이 돈이라면 둘이서 밥을 한 끼 먹을 수 있는 정도. ㅁ의 캐리어 백에 내 배낭을 묶어 하나로 해서 50루삐를 줄였다.
<꾸뜹미나르 유적-세계문화유산>
전철을 타고 꾸뜹미나르 유적을 보았다. 입장료가 현지인의 30배이다. 1인당 300루삐.
휴마윤 무덤에 가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며 현지인 줄에 서서 입장료를 끊기로 했으나 현지인 줄에는 아무도 없다. 우린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돈이 없다며 입장료를 깎아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안 된다는 대답이 되돌아 왔다. 갑자기 ㅁ이 나를 업고는 우리 1사람이라며 1사람 표만 끊으면 안 되겠냐고 너스레를 떤다. 표를 끊는 사람도, 안내하는 사람도, 얼떨결에 업혀 있는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야, 어떻게 날 업을 생각을 했냐?"
고 물으니 아침에 캐리어 가방이 내 배낭을 업은듯 합쳐 있는 생각이 났다나.
<후마윤의 무덤>
어쩔 수 없이 500루삐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자한이 휴마윤의 무덤에서 시작해서 타지마할에서 끝을 냈다는, 휴마윤이 죽은 뒤 그의 측근들 150명도 함께 묻혀 있다는 밭 전(田) 자의 장방형 무덤을 둘러 보았다. 돌로 무늬를 새긴 예술 작품이었다.
간디를 화장했다는 라즈 가트를 갔었고 간디 박물관에도 갔으나 그 날이 문 닫는 날이라 간디에 대해 더 공부하고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중앙 박물관으로 갔다. 독어, 영어, 일본어 등은 해설 서비스가 되는데 한국어는 되지 않았다. 다른 전시장에는 가이드비가 따로 있던데 여기는 포함되어 있는데 문제는 한국어가 없다는 거다. 아직 우리나라의 국력이 못미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박물관>
<인디아게이트로 몰려가는 군중들>
더운 델리를 몇 군데 찍으려니 너무 피곤했다. 대통령궁 쪽에 있는 인디아게이트 앞 잔디에서 마냥 몰려가는 인도의 군중들을 보았다. 그들은 부자들을 위한 법이 통과되어 그걸 무효화 하라는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고 ㅁ은 내게 설명해 준다.
숙소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맥주가 한잔 들어가자 ㅁ은 자기랑 여행 같이 다녀서 고생했다는 말을 한다.
"야, 그런 말도 할 줄 아냐?"
했더니
"그럼, 누구보다도 자신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는 말과 함께.
나도 니 덕분에 시행착오 없이 잘 여행했다고 고맙다고 했다.
델리공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ㅁ은 방콕행 비행기를 타러 가고
나는 경유지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밤 11시 35분.
110822 (월) 한국
홍콩 공항에서 9시 반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니 오후 2시다. 깨몽이 마침 출국하는 사람 배웅을 하러 왔다가 기다려 나를 마중했다.
인도를 갔다 온 사람들은 남과 북이 갈리듯 확실한 구분을 짓는다. 그 더러운 나라에 돈버리고 왜 가냐는 사람과 매력이 있다고 또 가보고 싶다는 사람.
뭔가 조금은 내면의 깊이가 깊어져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기차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의 말처럼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바라나시라는 도시에서 좀 더 머물렀어야 했을까?
얼마전부터 월급의 1%를 떼어 저축을 한다. 그 돈이 한국에서는 과자값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가난한 어떤 나라의 어린이에게는 매달 학비와 생활비가 될 것이다. 그 어린이를 여행중에 만나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어린이들을 만났지만 성의있게 찾지 않아서 못 만난 듯 하다.
아마도 내가 몸고생하며 다닌 이번 여행이 그나마 즐거웠던 건 그들의 생활에 뛰어들지 않고 이렇게 방관자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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