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전화위복

햇살가득한 2007. 2. 27. 21:50
2006.12.22 22:28

남들처럼 휴대폰을 냉장고에 넣거나 하는 중증 건망증은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정적인 장소에서의 건망증이 한가지 있으니

주방 가스불 위에 뭐 올려 놓고 잊어버리기....

 

렌즈를 소독한답시고 몇 개나 태워 먹었고

졸다가 지쳐 꺼멓게 탄 된장찌개 그릇은 또 몇 개이고...

하릴없이 물 졸여서 수증기 만들기.

 

도자기로 만든 아끼는 주전자가 하나 있다.

찻물에는 도자기 그릇이 제격인 거 같아 스텐레스를 밀쳐두고 쓰기 시작했는데

목에 좋다는 모과를 올려놓고 또 뭐에 쏠렸는지 헤벌레~~

문을 닫아 뒀으니 냄새도 잘 나지 않고

이미 까맣게 타 들어간 뒤라 주전자를 통째로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래도 거친 수세미로 닦아 봤다.

어느 정도 탄 것이 제거되는가 싶더니 더 이상 가시질 않는다. 

건강 생각한다고 좋은데 물 끓여 먹으려다가

탄 물 마시게 생겼다.

이리하여 도자기 주전자는 뒤로 밀려 나고 다시 스텐레스 주전자 등장.

그러나 이 주전자도 나의 건망증에 또 바닥을 꺼멓게 드러내보이며 주전자이기를 포기했다.

에궁.

찜찜했으나 도자기 주전자에 물을 다시 붓고 불 위에 올려 놓는 수 밖에.

또 뭣엔가-아무래도 TV 일겨.-홀려 있다가 부엌엘 우연히 가 보게 됐는데

이런이런!!

주전자가 물 한 방울 없이 저 혼자 뜨거워 어쩔줄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찬물을 한 공기 퍼 넣었더니

치르르 하면서 금세 줄어든다. (아마도 이때 타서 눌러 붙은 것이 떨어져 나온 듯. 뜨거운 것과 찬 것의 갑작스런 만남)

다시 한 공기를 넣으니 찬물이 금방 끓는다.

다시 한 공기를 넣고 나니 주전자는 그제서야 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얌전히 있다.

한참 후 물을 따라버리는데 시커먼 가루가 나온다.

쇠 수세미를 넣어서 박박 닦아 봤더니 전에 타서 눌러 붙은 것들이 죄다 떨어져 나온다.

타서 못쓰게 되었다고 밀쳐 두었던 주전자

이제는 헛개나무를 넣고 몸을 들썩이며 다시 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빠알간 헛개나무차를 내 주면서.

그렇지만 주전자는 늘 불안해 할 것이다.

언제 불위에 올려져 발가 벗겨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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