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여행이 엄마 치마꼬리를 잡고 친척집에 가는 거였다면
10대의 여행은 선생님의 의도대로 장소가 정해졌다.
20대의 여행이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면
30대는 꿈을 쫓아 떠난 여행이었다.
40대의 여행이라...
40대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이 있다.
경주에 살면서 나무 공예를 하는 사람이다.
쓰러지면 꺼멓게 썩어가며 주목받지 못하는 나무가 사람의 손에 의해 재탄생하는 것을 보면서 나무에 대한 짝사랑이 시작됐다. 아름드리 나무를 보면 가서 안아보고 나무로 지어진 한옥은 만져보면서 짝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다가 서각을 시작했고 흙과 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림을 하고 싶어졌다.
남자가 올린 작업실의 이정표는 독특함과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닉네임에 비춰본 그만의 캐릭터 나비는 꿈을 향해 날아가는 듯 보였다.
나무와 쇠의 조합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시간이 되면 틈틈이 나무 만지는 일을 배우고 싶다는 쪽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올린 집짓는 사진과 글을 보면서 감동에 휩싸여 사유한 언어의 한계를 느끼며 몇 개의 느낌표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톱을 든 팔뚝의 힘줄과 근육에서 그가 나무와 함께 한 세월이 느껴졌고
더운 여름날, 얼음을 등에 지고 일하는 모습에서 뜨거운 열정이 보였다.
그리고 며칠을 기다려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남자의 트럭에 올라탔다. 송진 냄새가 확 와서 안겼다.
글과 사진에서 본 강한 이미지 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이미지였다.
경상도 사투리 때문이었는지 또박또박 경쾌한 말투가 아닌 이야기에 집중을 하고 있어야 알아 들을 수 있었고 목소리는 낮았다.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니어서 말이 압축되어 있었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서 주제를 엉뚱하게 끌고 나가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보여주는 속 얘기는 비상하지 못한 날개를 접어 둔 의기소침함이 묻어 났다.
공방을 구경했다. 1년동안 만들었다는 수 십개의 칼들은 잡기 좋게 일렬로 늘어서 있고
자잘한 연장부터 육중한 기계까지 구석구석에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남자는 보컬, 트럭 운전 등을 했었고 목공을 배우기 위해 잠시 고향을 떠나 살았었다고 했다.
보컬이 힘들어 다른 길을 택했는데 더 힘든 나무 만지는 일을 하고 있단다.
그의 어머니가 내게 어떤 일로 왔느냐길래 일을 배우려고 왔다고 했더니
그건 뭐하러 배우려고 하느냐며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면서
그가 어지간히도 일에 매달려 엄마를 안쓰럽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실제로 그는 쓰러져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가지러 갔었고 작은 체구-신발 크기가 나랑 같다.-에서 힘을 쓰는 일이 더 버겁게 느껴졌다.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다.
방외지사 책의 주인공들이 세간의 삶과는 다른 좀 삐딱하게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소재로 쓴 글이라면
유명세는 타지 않더라도 열심히 자기 몫을 살아가는 약간은 움츠린 사람을 소재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꿈을 이뤄가는 사람이라든지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뭐 그런 정도가 될 것 같다.
<관솔 똥가리에서 사람들이 왔을 때 강냉이를 담아 내올 그릇을 떠올렸다. >
<바삭바삭한 새우깡 맛이 날 것 같은 관솔이다.>
내가 천연염색한 천으로 만들어 간 찻잔받침을 선물로 내놓으며
유명한 사람이 되면 만나 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러기 전에 만나야 한댔더니
남자는 내가 쓴 글을 칭찬하며 내가 먼저 유명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남자는 다리를 따로 붙인 것이 아닌 젖무덤처럼 봉긋한 다탁을 산소 용접기로 태웠다.
의지 강한 겨울철 흔적은 남고 무른 나무는 허물처럼 벗겨져 나갔다.
<산소 용접기로 낙동을 하는 모습>
<꿈처럼 타오르는 불꽃>
함지박이 모양새를 갖춰가자 그만 하자며 내게 자기 방에 가서 자라고 한다.
방문을 열었다. 방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늦은 시간 얼른 이불 속으로 들지 못하고 앉아 있는 건 남자의 노력과 세월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내가 참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만지던 함지박을 마저 마무리 할까 하여 작업실로 갔더니 이 남자 작업실 마루에서 자고 있다.
엄마 방에서 따뜻하게 잘 줄 알았는데...
아침 밥상에서 감기 기운이 있는지 약간 코를 훌쩍거렸다.
나도 여섯 시간이 걸리는 먼거리를 온 터라 이틀밤을 자면서 좀 배워가야지 했는데 하룻밤을 더 잔다는 건 정말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될 것 같다.
함지박을 완성하고 다식판을 만들고 가방을 꾸렸다. 그가 만들어준 칼 두 자루도 가방 맨 안쪽에 챙겼다.
남자는 차 시간이 많으니 바다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했고 1년이 넘도록 바다를 못 본 나는 그러자고 했다.
감포 바다는 성난 듯 크게 으르렁거렸고 바람이 막아서 걸음을 더디게 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비릿하고 짭쪼름한 미역 냄새가 구미를 당겼다.
연세가 우리 엄마랑 비슷한 남자의 엄마 생각에 회를 조금 떴다.
이미 기차는 놓쳤고 젓가락으로 국수 가락을 건져가며 우린 이루지 못한 꿈 얘기를 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유명한 경주는 카메라의 접사 뒷배경처럼 흐릿하고
내머릿속엔 나무와 꿈을 만지는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도드라져 근접 촬영된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일상 >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깨비한테 홀린 이야기 (0) | 2008.05.17 |
---|---|
엄마 부려먹기 (0) | 2008.05.12 |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녹차를 마신다고 하라 (0) | 2008.05.05 |
뭔 짓이람 (0) | 2008.05.01 |
똥 밟은 신발, 벌 서거랏 (0) | 2008.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