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깃발이 펄럭입니다(홍천 임도길 후기)

햇살가득한 2009. 7. 8. 01:57

깃발.

6.25 전쟁 때도 깃발아래 모여 그것을 휘날리며 적진을 향해 돌격했으리라.

 

홍천 임도길 깃발아래 모이시오.  

이런, 예상시간을 정해 놓고 움직이는데 오늘따라 계란말이는 왜 지멋대로 터지고 난리야.

김밥을 싸 온다는 사람 때문에

밥 싸는 김에 조금 더 싸겠노라고 김밥 사오지 말랬는데 

오늘따라 계란말이도 안 되고 밥도 질고...

더군다나 세 정거장만 가면 복정역이건만

그래도 난 깃발 아니냐.

광화문까지는 못가더라도 양재에 가서 인원 체크는 해야할 터.

스킨, 로션만 바르고 후다닥 뛰어 나가다 보니

이런, 카메라도 안 가져 오고 (아이리스님 사진 써도 되죠?)

치명적인 아이펜슬도 안 챙겨오고..

내세울것 없는 외모에 눈썹이라도 제 자리에 있어줘야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어자피 갈옷으로 모자까지 챙겨 입어서 나그네 복장인데 눈썹 하나쯤이야 선 그어 뭣하랴.

첫길이라고 7시 몇분부터 다른 장소에서 기다렸다는 황톳길님을 태우고 버스 출발.

회비를 계산해 보니 얼추 저녁으로 막국수를 먹어도 되겠다.

홍천 친구네 집에 연락해서 친구 오빠네 집에서 막국수를 먹기로 예약했다.

 

대절한 버스가 6번 도로를 타고 양평을 지나 며느리 고개를 넘어 홍천으로 들어선다.

홍천.

노송님 말대로 난 홍천 촌년이다.

주말이면 양지마을을 온통 삼겹살화로구이 연기로 훈제시키는 그 양지말에서 난 말괄량이 삐삐였다.

동네 조무래기들을 모아 뜀박질을 하고

군인들이 파 놓은 참호에서 총쌈을 하고

칡잎을 너댓장씩 모아 아카시아 가시를 찝어 공책을 만들어 가시로 점을 찍어 가며 선생 노릇도 하고

사금파리를 모아 고운 모래를 담아 밥상을 차리고

반찬에는 개망초의 흰 꽃잎을 따 솔솔 뿌리며 미원이라고 했다.

 

6번도로를 타다가 양지말화로구이를 끼고 우회전을 한다.

양지말에 개울을 건너 산밑에 달랑 하나 있던 내가 태어난 집.

몇년 전 찾아 갔을 때 사랑채는 뜯기고 안채만 남아 있었다.

"제가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면 생가 복원해야 될지 모르니 이 안채는 뜯지 말고 놔두세요."

웃으며 얘기 했는데 지금은 그 안채마저 뜯겨 새 집이 들어섰다.

물이 참 시원한 집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한여름 점심을 먹을라치면 동네 사람들은 노란 주전자를 들고 우리집으로 물을 길러 오곤했다.

그 노란 주전자에 온도차 때문에 이슬이 맺혔다.

 

사람들 붐비는 데서 5천원짜리 막국수를 먹을 것이냐, 아님 7천원짜리 우렁쌈밥을 먹을 것이냐.

파로네님은 개울도 있고 한가로운 우렁쌈밥을 먹자고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예약을 해서 안 된다고 한다.

소소한 바람도 수용하는지라 이 깃발은 이리 저리로 펄럭인다.

"그래. 다음엔 너네 집에 가서 먹을게."

 

버스 기사님은 표정만큼이나 여유롭게 굽이진 높은터 골짜기를 차분하게 돌고 또 도신다.

높은터.

운동장이 좁아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면 화장실을 돌아 뛰어야 하는 분교는 이미 폐교된지 오래고

그곳엔 "포테이토 밸리"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삼마치2리 마을회관 앞에서 차선을 둘로 나누는 황색이 사라진 곳에서 버스는 되돌려야 한다.

모여 자기 소개를 한다.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핀 꽃길로 들어섰다.

  

지난 1월에 답사차 왔던 길이다.

길을 돌고 또 돌고...

 

 

2시간만에 6.5키로를 걸어 삼마치 터널에 도착했다.

숲체험 탐방로.

 

 

 

자작나무 숲을 지나

 

 

 

 

 

발을 감싸는 신발을 벗었다.

바늘같은 잣나무의 낙엽이 발바닥을 찌르건만 발바닥은 그래도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다 한다. 

지지난 주 답사 와서 마를 캐겠다고 후비다 묻어 둔 마는 잘 자라고 있을까?

그새 둥글레는 열매를 달고 있었고

잣나무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던 다래순(?)은 벌레의 공격에 지쳐 이파리가 좀 피곤해 보였다.

 

 

점심 먹을 자리는 숲체험 교실이 열리는 넓은 터다.

늘 비탈진 곳에서 먹던 나길도의 점심장소가 펑퍼짐한 곳이라고 어느 회원은 좋아라 한다.

삼삼오오 모여 반찬을 나누며 권하고 싸 갔던 밥마저도 남긴 채 뚜껑을 덮었다.  

 

 

아그네스님이 주황색 하늘말나리를 꺾어와 갈색 모자에 꽂아 준다.

펑퍼짐한 바지를 한 쪽만 걷어 올리고

히죽거리기만 하면 될 듯 하다.

 

 

 

1시 45분 출발.

이제는 본격적으로 걸을 일만 남았다.

남은 거리는 14키로.

숲체험 코스가 한 번 더 있었지만 지난번 답사 때 길을 잘못들어 낭떠러지로 내려오는 바람에 이번엔 생략하고 임도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높은터부터 삼마치고개까지의 길은 수해에 대비해 콘크리트 옹벽을 쳐 놨지만 지금 걷는 코스는 원시적인 길이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길을 가다

꼬부랑 똥이 마려

꼬부랑 똥을 쌌네.

예나 지금이나 애들은 똥 얘기를 좋아한다.

꼬부랑 길을 걸으며 꼬부랑 할머니가 쌌을 돌돌 말려 올라간 똥 생각도 하고 모퉁이를 돈다

 

 

바람이 갈옷 섶으로 들어와 배를 돌아 나간다.

등짝으로도 돌아 나가고

목덜미에도 땀이 날새라 잽싸게 훔쳐 달아난다.

역시 바람은 산바람이구나.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 마신다.

초록색깔이 마구 콧속으로 빨려 들어 온다. 

 

무전이 온다.

쉬었다 가자구요.

쉴 곳을 굳이 찾지 않아도 그 자리가 그냥 쉼터다. 

지나가는 차도 없고 곳곳이 그늘이다.

오르막 내리막도 없고

길도 원시적이어서 정기도보나 달빛도보를 하자고 한다.

한 겨울에 눈 왔을 때도 괜찮을 것 같다.  

 

 

전화가 온다.

앞서 가던 마라톤님.

작은 계곡에서 발 담그고 갈 거라고 했는데

그 계곡을 찾지 못해서 종착지까지 거의 다 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여기서 밑줄 쫙.

깃발을 앞서가지 말라.

계곡을 못 찾다니 그럴리가.

가뭄으로 계곡 물은 말라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래도 제법 발을 담글만 하였다.

물놀이 한다고 여벌의 옷도 챙겨왔다는 00님.

지지난주만 해도 물이 제법 많았는데...

그래도 발 담그고

알콜 한 방울도 털어 넣고

아이들마냥 물장난도 하고 양말을 신었다.

종일 일한 발이 냉찜질에 바짝 정신차리고 다시 걸을 준비를 해 주었다. 

 

 

좀 이른 멍석딸기도 따 먹고

이제 꽃이 진 복분자 딸기는 아직 익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놀러 나왔다가 길 잃은 아기 청개구리는

두 손으로 깍지를 꼈는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다.

 

 

난 너를 해치지 않아. 그냥 반가울 뿐이야.

다시 놓아주려는데도 오히려 손가락으로 더 기어 올라간다. 몇걸음 손을 타 봤음 됐지. 그만 내려. 

그늘로 들어 가거라. 햇빛 강한 양지로 가지 말고. 

 

 

 

춘천까지 이어진 중앙고속도로의 소음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을로 접어 들었다.

동면 월운리 버스 종점에는 버스를 대기시키고 우리를 기다려 준 기사님이 계셨다.  

 

양지말로 들어섰다.

고기가 구워지는 건지, 내가 훈제가 되는 건지. 온통 북새통에 우리 33명은 자리를 잡았다.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 먹는다는 친구 오빠네집은 주말에는 예약도 안 받는다는데

그래서 입이 걸은 친구는 예약 시간을 세 번이나 변경한 내게 욕바가지를 해댔다.   

막국수에 더덕무침과 함께한 이슬.

막국수 삶은 물에 커피를 타 내는 친구 오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강원도를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산 바람이 시원하다는 말.

꽃길이 예쁘다는 말.

오르막이 없어서 걷기 편하다는 말.

저렴한 회비에 막국수도 맛있었다는 말.

그런 말들 속에 덩달아 행복해 지는 나는 밀리는 버스 쯤이야 뭐. 

 

동면 월운리를 다음 지도 검색창에 쳐 놓고 산세를 살피고 있다.

월운리 마을로 들어서면서 보았던 오른쪽 임도.

이미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 된 군사지역의 훈련 건물들은 방치되었던데 그 쯤으로 연결된 임도가 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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