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
추석 다음날.
큰언니, 작은언니, 나 세자매에 엄마까지 모처럼 넷이 모였다.
이렇게 단촐하게 모녀가 만나는건 1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
늘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인지라 그만큼 의미도 크고,
더 의미있는 일은 모처럼 함께 여행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식물원을 제안했고 역시 꽃을 좋아하는 모녀.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 칭찬도 하면서 핸들을 잡았다.
황금 들판이 내 것마냥 뿌듯해 하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내 코에는 더 상큼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지도를 보며 헤매고 헤매 결국 00 식물원에 도착.
입장을 하는데 표를 받는 사람 시기도 그렇거니와 비가 많이 와서 꽃이 다 녹아 별로 없댄다.
개의치 않고 안을 들어섰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넓은 식물원 산책삼아 걷는 것도 좋겠지만
내 목적은 꽃구경을 하겠다고 몇 년을 별러서 온 것이었고 산책만을 하기엔 입장료가 상대적으로 비쌌다.
환불을 요구했다.
꽃보러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나의 설득을 무시하던 매표원.
내 뒤에 표를 사려는 사람이 오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환불을 해 준다.
2탄
식물원에서 나와 어디 인근에 갈 데가 없을까 지도를 열심히 뒤져 보는데, 떠오른 곳이 와우정사.
갈림길마다 멈춰서며 지도와 길을 확인하고 언니들은 네비게이션을 사라고 성화를 하고.
나, 그래도 꿋꿋하게 찾아간다. ㅎㅎ
엄마가 좋아하는 만두국도 한 그릇씩 시켜 점심으로 먹고.
(엄마가 좋아하는 거 드시면 괜히 나도 기분이 좋다.)
드디어 와우정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키고 지나치게 청명한 햇살에 왕잠자리 썬글라스를 끼고 차 문을 열고 몇발짝 떼었을까,
자가용을 탄 스님이 차 유리문을 열고 나를 보더니 관상이 좋다며 말년에 큰 복이 온댄다.
아, 이 스님 사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가뜩이나 마음이 시린 요즘 내 심정을 어찌 그리도 잘 아실까.
"제가 썬글라스를 꼈는데 어떻게 관상을 볼 줄 아세요?"
스님은 내 말에 개의치 않는다.
훗날 자신을 이기면 큰 복이 온다는 글씨 쓴 걸 주겠단다.
이런 횡재가. 이러다 조만간 좋은 일이 있는 거 아냐?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앞서간다.
그가 써서 봉투에 넣은 글자를 받아 들었다.
"보시 좀 하시지요."
뭐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내가 불교인은 아니어도 적어도 구경한 값 정도는 넣기도 하는데 대 놓고 하라니까 좀 그렇다.
"있다가 절에 가서 할게요."
했더니 지금 자기한테 하란다.
그래서 차 안에서 만원을 꺼내와 건넸더니 관상을 보아하니 2, 3만원은 할 사람이라며 탐탁지 않아 한다.
아, 여기서 번뜩 스쳐가는 찜찜한 생각.
한 마디만 더 했다면 다시 맞바꾸자고 하려 했으나 더는 말이 없기에 절로 올라갔다.
개량한복에 갈옷 입은 내 차림새 때문이었을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성당에서 자기 가슴을 치면서 하는 말)
주차장으로 다시 가서 차 안에 지갑을 꺼내고 종이를 펴 보니 '自勝自福'이라 쓴 글이었다.
쳇, 이런 말 나도 할 줄 안다.
아까 그 승복을 차려입은 스님과 그 옆의 여승이 여전히 차 안에서 유리만 내린 채 사람들을 상대로 똑같이 봉투를 내 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정의감에 불탔던 나.
"스님, 전 기분이 찜찜해서요. 이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보시는 불전함에 넣을테니 돈을 돌려 주세요."
그랬더니 쓴 글을 달란다. 그러면서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고 기와불사(?)하는 중이라 했다.
2차 환불을 하고 절에 올라가
"아래에서 글 써주고 돈 받는 스님 이 절 소속 맞나요?"
했더니 그 사람들 또 왔냐며 절 관계자가 쫓으러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3탄
환불을 해서 사진 찍던 곳으로 돌아오니 아까부터 우리 모녀 사진을 찍어주던 60대의 남자가 엄마 어깨를 주무른다.
자기가 눌러서 아프면 몸이 좋지 않은 거라며.
팔순이 된 엄마 어디를 누르면 안 아플까마는 엄마는 여기저기 그 남자가 누르는 곳에 통증을 표시했는데 그 남자
고쳐주랴냐고 묻는다. 그 남자의 가슴팍에는 침이 꽂혀 있었다.
나를 물로 보지 마라? 나는 물이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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