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가족 | |
조회 : 161 스크랩 : 0 날짜 : 2005.02.15 09:24 |
첫째놈-길쭉이>
내가 이 놈이 좋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녀석의 잘 생긴 외모 탓도 있었지만
익고 익어서 뽀얗게 분가루를 내는 녀석의 알참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엄마네 집엘 가면 엄마는 자랑처럼 나를 텃밭으로 데리고 가셨다.
엄마의 텃밭은 성당에서 뭔가를 지으려고 마련한 부지인데
붙임성 좋은 엄마는 수녀님들 밭일을 도와주다가 귀퉁이를 좀 얻어 부치게 됐다.
그런데 엄마의 텃밭에 대한 불만은 내가 갈 때마다 조금씩 내비쳐졌다.
"얘,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수녀님이 더덕꽃과 잡풀을 분간 못해서 더덕 덩쿨을
다 잘라 버리니?"
그러기도 하시고, 어떤 땐,
"수녀님들이 배추를 글쎄 이렇게 촘촘히 심어 놨단다."
하고 흉도 보았다.
엄마의 텃밭은 텃밭 그 이상의 것이었다.
젊어서부터 일을 놓으신 적이 없는 엄마는 이젠 일거리가 없자
당신 자신이 이제 세상 다 사신것 같다며 허탈해 하셨다.
그래서 텃밭은 엄마가 붙잡고 있는 노년의 끈이기도 했다.
추석을 막 지내고 엄마는 나를 그 텃밭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도 작년에 집 앞 텃밭에 고추며 고구마, 상추를 아이 돌보듯 하며
키워 먹었던 터라 엄마의 텃밭이 궁금하기도 했다.
고들빼기, 실파, 배추, 알타리 무......
"얘, 난, 이때껏 없으면 없었지 남의 것 요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살았다."
엄마가 검지 손가락에 엄지 손가락을 비껴 대며 <손톱만큼>의 모양을 만들었다.
엄마가 이렇게 얘기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성당의 부지는 모란시장 귀퉁이에 있어서 5일마다 장이 서는 모란장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때문에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지
아님 텃밭의 작물을 보호함인지
철조망(휀스)을 쳐 놓고 자물쇠를 잠궈 놓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작물을 뽑아가고 호박순을 잘라 놓는가 하면
호박이 달리기 무섭게 따 가는 것이었다.
"얘, 이거 봐라."
엄마는 넓적한 호박잎을 이리 저리 헤치더니 생선을 담는 스치로폴 박스를 찾아내
그 안에 담긴 호박을 가리켰다.
내가 데려온 첫째놈 길쭉이었다.
내가 호박죽을 잘 쑤어 먹는 걸 아는 엄마는 남들 눈에 안 띄게 감추고 또 감춰서
키워온 호박이었다.
그날 엄마는 아주까리 잎도 엮어서 내 차에 실어 주셨다.
"연한 순만 따서 묶은 거란다."
어떻게 해 먹는 줄도 모르고 해 먹는 게 귀찮아 거절을 하였지만
엄마의 연한 순만 따서 묶었다는 그 정성에 싣고 와 그늘에서 파아랗게 말려 놓았다.
어쨌든 잘생기고 알찬 길쭉이 호박은 바로 먹지를 못하고 설이 지난 지금까지
나머지 세 개의 호박을 부둥켜 안고 지금껏 살고 있다.
<둘째놈-두꺼비>
두꺼비처럼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둘째놈을 만난 건 제부도의 화성에서였다.
늦가을, 바짝바짝 다가오는 시험 날짜에 머리에 입력은 되지 않고
꼭 이런 때는 오만 것들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그 중 제부도의 조개구이가 먹고 싶었다.
하늘은 맑고, 단풍은 빠알갛고, 바람은 살랑살랑!!!
이런 날 나보고 도서관에 쳐 박혀 있으라고? 그것도 두꺼운 책에 눈을 묻으며?
친구를 꼬셔내었다. 그래도 뒤가 켕겨서 무릎에 책을 올려 놓고 공부한 내용을
복습삼아 이야길 해 줬다.
어쨌든 조개구이를 다 먹어갈 즈음엔 밀물이 갯벌을 덮어
그 위에 빨간 노을을 펼쳐 놓고 있었다.
되돌아 오는 길에는 제부도 여행을 온 사람들을 상대로 반짝 장이 서나 보다.
밭에서 방금 뽑아온 듯한 이파리가 꼿꼿한 배추며 무, 당근, 버섯....
삼겹살을 위해서 상추를 사야 하는 게 정상이련만
남미의 레이스가 요란한 치마를 연상케 하는 적상추를 사면서 삼겹살을 생각하고
쌈 싸 먹으려고 한 통만 사려던 통 배추는 덤으로 한 통 더 얻고...
재작년 본의 아니게 호박 서리를 하게 된 그 덜 익은 듯 퍼렇고 울퉁불퉁 못생긴 호박이
내 발길을 잡아 끈다.
일반 호박으로만 죽을 쑤면 단 맛이 덜한데 단호박인 저 두꺼비
(정확한 명칭 아는 이 있음 좀 알려 주셔요.ㅎㅎ)호박을 섞어서
호박죽을 쑨다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또 단호박으로만 호박죽을 쑤어 봤더니 처음엔 좋지만 금방 질리는 그런 맛이 있었다.
(김삿갓 호박죽 연구가 되다.ㅎㅎㅎ)
해서 이 놈도 첫째 놈 옆에 두고 보니 색깔도 주황색과 조화를 이루니
또 죽으로 못 끓여 먹었다.
호박가족 초상화>
<셋째놈-예쁜이>
주먹만하면서 짙은 주황색을 띄는 이 호박은 작년에 복숭아 과수원에 들렀다가
입양한 놈이다.
장호원은 깨물면 노오란 물이 실실 나오는 황도 복숭아가 유명한 고장이라
어느 과수원에 들러 다섯 박스를 사서 여기 저기 돌렸다.
앉아서 택배를 기다려 받을 수조차 없이 바쁜 은사님은 주소를 묻자 보내지
말라며 성화셨다.
그 성화 속에는 그깟 복숭아 때문에 스케줄을 조정하며 택배를 기다려야 하느냐 하는 게
내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난 꿋꿋하게 보내 드렸다.
얼마후,
"얘, 복숭아 받아 먹을 만 하다, 얘. 참 맛있네."
하시길래 난 내가 농사 지은것 마냥 의기 양양해서
"장호원 복숭아 정말 맛있죠?"
했다.
어쨌든 그 집 창고만 들러서 복숭아만을 사 왔다면 김삿갓이란 닉네임을 쓰지 말아야지.
농촌의 마당으로 쓰적쓰적 걸어 가 봤더니 화분에 화초 고추며 여러 예쁜 꽃들이
가을 햇살에 화사하게 피어 있었고, 수돗가에는 셋째놈 예쁜이 형제가 몇 놓여 있었다.
쥔 아줌마한테 호박이 어쩜 그리도 예쁘냐고 너스레를 떨며 한 개 주심 안되냐고 하니까
그러잖아도 복숭아 사러 왔다가 달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일부러 키운다나.
난 그 예쁜이 형제들 중 잘 여문 놈 두 놈을 골라 또 신발장 위에 올려 호박 가족으로
입적을 시켰다. <한 놈은 덜 여물었는지 얼마 후 자살을 해 버렸다.>
<넷째놈-춘향이>
헉헉, 글 쓰는 게 말 하는 것 처럼 힘든 밤이다.(누가 시켰냐? 누가 시켰나구? 아뇨.)
영양 금마래네 집엘 불시에 가게 됐다. 성남에서 출발하는 로기 차를 얻어 타고.
금마래, 살림살이 보니 사람 다시 보이데. 평소에 그렇게 보긴 했었지만.
살림 살이를 즐기는 것 같았다. 뽕잎차, 들국화차, 온갖 조미료, 없는 게 없는 집.
인어공주님이 씽크대 선반을 열 때 마다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당면도 있어?"
또 열어 보고는
"국수도?!"
이렇게 인어공주님이 놀라는 데는 혼자사는 총각 살림에 없는 것이 없다는 것과
가지런히 정돈되었다는 그것이었다.
내일은 우렁각시를 찾으러 개울로 나가봐야겠다고도 했다.
금마래는 손재주도 있어서 포크며 뒤집개, 주걱 등을 대나무로 깎았다.
대나무를 불에 달구어서 휘기도 했고 정교하게 깎은데다가 사포질까지하는
깔끔한 마무리를 했기에 로기는 아빠랑 따로 살림 난 지가 한 달밖에 안 됐다며
살림살이가 없다는 비비꼬이는 소리를 해가며 자꾸만 주걱과 뒤집개를 만지작 거렸다.
나도 포크가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처럼 그 작은 나무에 세 갈래 홈을 파 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여
포크로 향하는 미련을 잡아 매었다.
그런데 방 위 선반에 올려 있는 통통하고 동글납작한 호박 한 개.
통통한 볼, 도톰한 입술을 가졌을 것 같은 춘향이 같다고나 할까.
금마래도 방안의 분위기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옷이 걸려 있고 오디오가 있고 물론 동쪽으로 난 넓은 창에서 햇빛이
기마병처럼 쳐들어 오겠지만 한쪽 귀퉁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작고 예쁜 호박도 구색을 더 갖춘다고 생각했으리라.
이럴 줄 알면서도!
"금마래, 우리 집에 주먹만한 빨간 호박이 하나 있거든.
그 호박이 혼자라서 되게 외로운가봐."
하면서 호박을 들고 나왔더니 금마래 뭐라고 한 소리 한다.
사실 이미 3명의 호박 가족이 있긴 했지만 두 놈은 곧 먹힐 놈들이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를 맞아 줄 놈들은 두손바닥 넓이의 작은 금마래 호박과
빨간 호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마래가 호박을 이렇게 키우기까지는 꽃이 피는 과정하며
호박잎에 숨어서 익어가는 것하며 다 봤을텐데.
떠나는 날, 금마래는 옻나무를 쪼개서 비닐 봉지에 담아 주고
방으로 들어가 통통한 그 호박을 안고 나왔다.
나는 그래서 매일 문지기처럼 현관문 옆 신발장 위에 놓인
호박들의 가족의 배웅을 받곤 한다.
그런데 이쁜이는 좀 병을 앓아 썩고 있다.
조만간 썩은 곳을 도려 내고 씨앗을 꺼내 올 봄에는 담장에 빠알갛게 올려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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