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리에서 | |
번호 : 13614
글쓴이 : 김삿갓 |
조회 : 130 스크랩 : 0 날짜 : 2004.09.06 20:18 |
이른 봄, 한골댁 병문안을 갔다가 표고버섯 종균을 넣은 참나무를 하나 얻어 왔다. 습기를 좋아하는 녀석을 아파트에 놔두려니 화장실밖에 없는지라 변기앞에 놓고는 일 보면서 녀석을 살펴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흙을 담은 스치로폴 박스에 세워두고 샤워기로 물을 뿌려 줘도 참나무는 말라서 점점 골이 깊게 갈라지기만 할 뿐 버섯을 보여주지 않는다. 해서 오늘은 녀석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보내야겠다고 맘을 먹고는 텃밭으로 들고 나갔다. 어디가 좋을까? 텃밭 가장자리는 참나무와 잡나무가 우거진 수풀이라 무서움을 많이 타는 나는 숲으로 들어 가지 못하고 수풀 우거진 곳에 세워 놓았는데 그러고 보니 햇빛을 받겠어서 다시 장소를 물색했다. 잡풀과 잡풀을 연결지은 거미줄을 끊으며 수풀을 헤치고 참나무를 내려 놓는데 "헝? 이게 뭐야?" 전혀 생각지도 않은 알밤이 하나 떨어져 있다. 참나무를 세워 놓고 알밤을 줍고 수풀에서 기어나와 위를 보니 햐! 어린 밤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되었건만, 사흘이 멀다 하고 뻔질나게 드나들던 텃밭이었는데 그 언저리에 밤나무가 있다는 걸 몰랐다니.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잎을 달고 기다란 밤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밤나무는 그렇게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로 집게를 만들어 풋밤송이를 몇 개 따서 발로 까면서도 스승을 만난듯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밤나무는 밤나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표고버섯 종균을 담은 참나무는 습기 많고 바람 잘 통하는 그늘 그 자리, 제 자리에서 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밤 알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는데 두 어 그루 밤나무를 더 발견하였다. 멀리 있는 것만을 쫓던 나는 코 앞의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제 곧 알밤이 벌리라. 한 알 한 알 알밤을 줍듯 윤기나는 행복을 주워 담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