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를 제법 쏟아 놓더니 하늘은 소스라치도록 찬 파란 색깔을 드러냈어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지만,
왜 난 여자이면서도 가을의 계절을 심하게 타는지.
고등학교 다닐때도 그랬지요.
도서관 간다고 책가방에 도시락까지 챙겨 넣고 대문을 나서다가
하늘을 쳐다보고는 그 하늘빛이 너무 좋아서
책만 빼 놓은 채 무작정 걸어서 억새풀이 너풀거리는 저수지 둑에 앉아
시인이라도 된양 계절을 온 몸으로 느끼며 뒹굴다가
도시락 까 먹고 집으로 돌아오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파란 가을 하늘을 집안에서 보는 것은 가을 하늘에 대한 모독이다며
또 들로 나가게 됩니다.
오늘은 요즘 힘들어서 자꾸 안으로 파고 들려는 동료에게
바깥으로 좀 끌어 내려고 단양으로 함께 나섰습니다.
도담산봉을 구경하고 유람선을 타고.
정자에 올라 맞은 편 높은 곳에 위치한 산꼭대기 마을엘 가 보자며
나섰는데 결국엔 찾지 못하고
해가 넘어가는 저녁을 맞이했지요.
원래 밖에 나가면 빈 손으로 들어 오는 법이 없는 삿갓인데
이젠 저랑 다니는 사람도 빈손으로 들어가지 않네요.
수수를 꺾고 있는 할머니가 계시길래
친구 수수대를 몇 개 얻어서 꽂아 놓고 싶다니까 할머니는 흔쾌히 가져가라시네요.
제가 체험 삶의 현장 촬영 좀 하자며 낫을 건네 받아서
수수를 꺾는데 할머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잠까지 재워달랄 거 같다며 얼른 가라고 하시네요.
사실 내일도 휴일이라 여건이 된다면 군불땐 흙집에서 이런 저런 옛날 얘기도 들으며 하룻밤 묵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만 속내를 들켜 버렸지 뭐예요.
수숫대 한 개를 들고 오며 내년엔 수수 농사도 질 생각을 하니 뿌듯 합니다.
그런데 저랑 같이 다니는 사람들 이젠 저보다 더 챙겨 오는 걸 좋아하니 큰일입니다.
보는 것도 저보다 더 잘 본다니까요.
옆자리에 앉아서 보고는 떨어진 대추를 주워 가자고 해서 결국엔 차를 돌려 대추 몇 알을 줍기도 했구요.
조각물을 세운 어느 폐교에 들러 구경을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방향이 같은 할머니를 태워드린다고 했더니 사양을 하시더니 뒷자리에 타십니다.
룸미러로 보니 할머니 얼굴보다 보따리가 더 크게 들어 왔어요.
우리 엄마 같은 모습이네요.
원하는 곳에 내려드리니 집이 길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을 건너야 한다길래
집까지 태워드리겠다고 다시 타시라고 했더니 괜찮다시네요.
차에서 내려 짐을 들어 다시 싣는데 이런 들지도 못할 짐을 어떻게 저 마을까지 지고 가실까.
들 만큼만 짐을 만들어 들고 다니시면 좋을텐데
이 할머니들 욕심이란 게 늘 그렇지 않아서
자식들 마음을 아프게 한답니다
"뭘 하셨길래 짐이 그렇게 무거우세요?"
전 그냥 인사치레로 물은 거였어요.
요즘엔 도토리도 없을테고 그렇다고 고구마 자루처럼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냉이 캐러 갔는데 요즘엔 약을 쳐서 그것도 없어요."
마을회관앞에 할머니를 내려 드리니 할머니는
된장찌개를 끓여 먹으라며 또아리처럼 말은 달래를 두 묶음 주시네요.
할머니는 이, 고마워서 어쩌나, 복받으라고 하시고 저는 괜찮다고 자꾸 그러고.
그런데 안 받으면 할머니가 너무 미안해 할 거 같아 잘 먹겠다며 받아 넣었어요.
"그 할머니 우리 만나서 손해 봤네. 버스 타면 공짜일텐데, 장에 가서 팔 달래를 두 묶음이나 주셨으니."
남의 가게 앞에 수건을 쓰고 공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이것저것 한웅큼씩 물건을 내 놓고 앉아 계실 할머니들 생각이 났어요.
집에 돌아와 달래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봉지에서 꺼내보니 생각했던거 보단 훨씬 많네요.
고마움보다는 자꾸 미안함이 드는 저녁이예요.
알뜰히 다먹어서 버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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