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랑 나, 동생이랑은 세 살씩 터울이 나는데
온갖 일을 꾸미기는 언니가
그 행동은 내가
콩고물을 얻어 먹는 건 막내 남동생 차지였다.
그 날도 (내가 열 살 즈음) 언니는 땅따먹기, 고무줄 놀이, 뭐 이런 걸 하다가 싫증이 났는지
빨간 돼지 저금통을 들어 보이며 딱 백원만 꺼내서 한라산 캔디를 사 먹자는 거다.
언니가 뜨개질을 하는 코바늘을 가져 왔고
나는 돼지 저금통을 위로 들고
동전을 넣는 1자로 된 구멍이 잘 벌어지라고 엄지 손가락으로 누른 뒤
한 손으로는 코바늘로 동전을 살살 구멍 입구까지 끌어 내 왔다.
나올려 하면 다시 놓치고 놓치고 하다가
겨우 백원 짜리 몇 개를 꺼내서
500미터 쯤 떨어진 가게로 동생과 달려갔다.
한라산 캔디(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캔디였다. 납작한 삼각기둥 모양의 엿처럼 늘어지지도 않는-아무래도 엿을 좀 더 고아 엿 누룽지를 인 듯한-그런 딱딱한 캔디인데 그래서 오래 먹을 수 있었다.) 와 남동생은 길쭉한 풍선을 몇 개를 골랐다.
무엇이든 아껴 먹는 남동생은 똑같이 배분한 한라산 캔디를 혓바닥으로 빨아 아껴 먹었고
성질 급한 언니는 이미 다 먹고 남 동생것을 넘보고, 나는 늘 그 중간이었다.
하여튼 남동생 손에는 캔디가 들려 있었고 올록볼록 풍선도 아직 터져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엄마가 오신 거다.
엄마는 가벼운 야단을 치셨는데
우리 언니,
비열한 우리 언니는 그만 이 일에서 시침을 딱 떼는 거였다.
꺼내기도 내가 꺼내고 사기도 내가 사왔다는 거다.
하기사 동네 왈가닥은 나였고
친구 조카 물에 빠진거 구해 주다가 병에 찔려
그 바쁜 농사 일도 못하게 엄마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던 나인데 반해
언니는 동네 순딩이라고 불렸다.
피부는 하얘서 물렁해 보이고
순해 보이지만 결국엔 이런 일을 저질렀을 땐 아버지는 물론 엄마도 설마 둘째 딸이 그랬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는 그런 뒤로 호박씨 까는 그런 언니였다.
하여튼 동생은 어리다고 또 남자라고 야단을 덜 맞고
늘 돌아 오는 건 까무잡잡 기름종개-무슨 날쌘 물고기라고 하는데 본 적은 없는-인 내가 뒤집어 쓴다는 거다.
어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언니를 가담시키지 않고 나 혼자 단독 범행으로 돼지 저금통에 코바늘을 넣어 딱 백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집에 까지 가는 동안 한라산 캔디를 다 먹어야 하는데 그것이 딱딱한지라 깨물어 먹을 수도 없고 녹여 먹어야만 했는데
가게와 집과의 거리는 한라산 캔디를 다 녹여 먹을 만한 거리가 못 되었다.
하는 수 없이 텃밭을 매고 있는 엄마한테 부순이(참 촌스런 이름의 친구다. 지금 이 친구는 그 고향 동네에서 올갱이 해장국집을 하고 있다.)가 줬다며 엄마 입에 한라산 캔디를 넣어 드렸다.
물론 용돈을 준 적이 없는 엄마를 속이는 건 가게집을 하는 만만한 부순이를 둘러 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내가 제일 부러웠던 것은 가게집을 하는 부순이네였다.)
엄마는 호미를 내려 놓고는 나를 안아 주셨는데
아이구, 그 때 찔림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