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용기 끌어 올리기-제주도 걷기 후기

햇살가득한 2008. 8. 8. 11:05

나이가 들어간다는 어떤 것일까?

순간 떠오르는 단어들이 빗방울 튕기듯 머릿속으로 마구 떨어진다.

책임, 망각, 용기없음, 주저하기, 이리저리 재기....

제주도 장기 도보여행 공지가 오래전에 떴었건만 정작 출발 며칠 전에 비행기표를 끊은 건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 때는 혼자서 등산도 잘 하고

열아홉살 때 집안 반대에 일단 담장 너머로 배낭을 던져 두고 대문을 유유히 빠져 나가

여름 휴가를 즐기고 오던 일.

이런 것들이 한낱 과거의 일들로 회상되는 것이어야 할까?   

비행기표를 끊고 짐을 싸는데 오랫만에 해 보니 서툴기만 하다.

 

그리고 요즘엔 기억을 도와주는 보조장치가 카메라인데

첫사랑처럼 정을 들인 카메라를 일전에 소금물에 잠수시키는 바람에

온전히 내 머리로 기억시키려니 햇빛과 땀이 방해를 한다.  

(아래 사진은 다른 분들이 찍은 거 슬쩍 끌어 왔다.) 

많은 것을 기억할 수도 없겠고 굳이 다 기억할 필요도 없다.

 

 

7월 30일

걷기에 합세를 했다. 

제주도 세화의 음식점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화장실 가서 반바지로 갈아 입는데 

종아리로 눈길이 간 것은 이번 걷기에서 종아리가 얼마나 단련이 될까 싶어서였는데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그것을 보고 새삼 나도 놀란다.  

아,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 제주도 공항에서 사진을 찍었어야 했다.

새벽에 김포공항으로 가면서 화장도 하고 향기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땀냄새 나지 않은

빠닥빠닥한 청바지 차림의 모습을.

송당초등학교에서 도보팀을 만나고 나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짜장면을 먹자 마자 자리 깔고 누워 자기, 속옷을 배낭에 널고 다니기, 길게 자란 수염, 까맣게 그을린 얼굴, 물집 잡힌 발가락....

비자림을 코 앞에 두고 식사조는 저녁 준비를 위해 비자림과 다랑쉬오름을 못 가보고

낮에 내가 땡볕을 돌아다니며 얻어 놓은 숙소로 먼저 갔다. 

타인을 위해 철저히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사람들.     

 

 

7월 31일

성인봉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우도로 가기다.     

해가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움직였지만 해는 비웃듯 정면에서 강한 레이져를 쏘아댔다.

 

 

햇살은 돌담 틈 사이를 비집고 비추기도 하고

바닷물과 만나서 비취색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우산으로 1차 방어하고 모자를 썼건만 복면한 살갗까지 파고든다. 

나, 이제부터 닉네임 바꿀래요.

햇살가득한이 아니고, 햇살사라진으로.

낭만의 해변도로?

제주시장님, 제발 가로수를 심어 주세요.

결국엔 어느 횟집 그늘을 찾아 들었는데 3백미터만 오면 된다고 연락이 온다.  

소나무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을 피해 울퉁불퉁한 돌멩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맹물에 밥 말아 김치 한 쪽 얹어 먹는 점심은 맛으로 먹기보다는

일단 넣어 두고 보자는 심산이 크다.

 

 

일출봉을 쳐다 봤지만 오르기를 포기하고 우도가는 선착장으로 간다. 

그런데 걷다보니 일출봉을 불과 몇 년전에 갔다 온 기억이 스멀스멀 난다.

친구와 차로 여행을 해서 어디를 갔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다.

걷기는 기억을 오래 저장시켜 줘서 좋다.

해안도로를 걸으며 천천히 보았던 바다.

먼 바다에서 밀려와 하얀 모래사장과 만나는 파도,

옅은 파란색에 흰색을 탁하게 탄 듯한 얕은 바다,

그리고 흰색을 입고 풍덩 빠졌다 나오면 온통 짙은 파란색이 될 것만 같은 깊은 바다색깔. 

 

 

이런 것들은 차 안에서 발가락 하나 꼼짝 않고 휙휙 지나쳐가는 것보다는 오래 각인 될 듯 하다.

 

우도에서 저녁을 해 먹고 카레밥(국?)을 싸 들고는 은잠님이랑 대장님 낚시하는 방파제를 찾아 간다.

'별'에 나오는 스테파네트가 목동을 위하여 방울소리를 딸랑거리며 도시락을 갖다 주러 가듯 

내가 그녀가 된 듯한 착각이 든다.

대장님이 고기를 많이 낚았어야 하는데.

대장님은 그물 손질을 하고 계신다.

복어가 입을 뾰로통히 내밀고 "뽀뽀 해 줘."하는 것 같길래 까이꺼 뽀뽀를 해 줬다.   

낚시 하는데 떡밥값 2만원 들었다며 능청스레 연기를 해도 속아 주는 이 아무도 없다.  

  

 

 

8월 1일

우도에서는 우리 조가 밥 당번이었다.

다음날 일찍 밥을 챙겨 오느라 멋진 등대 구경을 양보해 주신 님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였다.    

가로수 없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함덕 해수욕장으로 이동한다. 

제주시장님한테 꼭 건의를 해야지.

햇빛을 가리는 우산은 살이 부러져 바람에 자꾸 뒤집혀 sky life 접시 모양이 되었다.

외계인과 교신을 하며 걷는다.

거기다가 마르지 않은 수건을 허리색에 빨래 집게로 고정을 시켰더니 이거 완전히 연미복패션이 되었다.

덕분에 땀띠난 종아리가 햇빛에 덜 노출되어 며칠동안 나의 연미복 패션은 계속되었다.  

 

 

 

8월 2일 

바닷가에 있는 사라봉 공원 걷는데 이 사람들 가까운 길을 두고 늘 이렇게 돌아간다.

메조키스트처럼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 같다.

속이 좀 울렁거리는 것이 일사병 증세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큼직큼직한 고기를 넣은 짜장밥을 한 그릇 먹고 나니 좀 살 것 같다.

(짜장면때문에 은비령님은 미역국에, 떡볶이에... 먹고 싶다면 온갖 것을 뚝딱 해 오셨다.) 

그래서 1차 도보가 종료되는 관덕정에서 마감 주를 마시며 다랑쉬오름을 가기로 결정하고 또 고통을 주문했다.    

 

다랑쉬오름.

자가용에 6명이 어깨를 비껴 앉으며 입구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을 오르며 엘리베이터 오르는 것처럼 맞은편 낮은 오름이 점점 멀어지고

그 오름의 우묵한 분화구 위로 무대의 조명발 비추듯 구름이 그림자를 비추며 지나간다.

오름의 중간쯤 올랐나보다. 아직 능선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약하게 분다. 

모자를 벗어 바람이 머릿속으로 지나나가도록 해 주었다. 상쾌한 바람이다.

능선위로 올라섰더니 모자를 눌러 붙잡아야 한다.

난 그때서야 깨달았다.

 

제주도에는 아주 큰 거인이 살고 있단다.

그 거인은 이웃 나라에서 돌멩이 하나 솟아오른 독도가 자기네 거라고 우기는 통에 자꾸 그런 헛말을 늘어 놓으면 바람으로 확 날려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돌아오는 중이었지.

그런데 여섯명의 소인국 인간들이 제주도에 놀러 온 거야. 그것도 다랑쉬오름을.

거인은 처음엔 숨을 조금 몰아서 내 쉬었어.

"여긴 내 놀이터거든. 조금만 놀다가 가."

그런데 개미만한 인간들이 자꾸 정상으로 올라가는 거야. 모자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는.

 

 

거인은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어.

어디 숨을 좀 더 크게 내 쉬어 볼까?

분화구의 풀들이 거인의 팔뚝 털처럼 이리 저리로 쓸려 다녔지.

거인은 점점 더 세게 숨을 내 몰아 쉬었어.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가 후~욱 내쉬는데 인간들은 날아갈 듯 하면서도 몸을 낮게 낮추었지.

거인은  재미있어서 더 세게 숨을 내 쉬었어. 사람들은 서로들 손을 잡고는 앉아 가네.

그래도 사진은 찍겠다고 이방향 저 방향으로 셔터를 눌러 대더군.

사람들이 날라가겠다며 내리막길을 걷자 거인은 이번엔 멋진 것을 보여주겠다며 분화구 안으로 바람을 몰아 주었지.

깃발들고 달려가듯 정상으로 올라가던 바람은 풀을 반으로 나누어 한 쪽은 좌로 한쪽은 우로 몰아 불더군.

그러다가 합쳐져 모아서 올라 치닫다가는 다시 쳐 내려와.

밑에서 쳐 올라오는 바람에 다시 부딪쳐 왼쪽으로 달려 가더군.

인간들이 감탄하며 쳐다보자 거인은 씨익 웃어 줬지.

이것쯤이야 뭐.

인간들이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거인은 좀 심심해졌어.

'그래, 잘 가. 내 놀이터에서 논다고 내가 좀 심통을 부렸다.'

 

 

8월 3일

버스 버스투어가 시작되었다. 

좀 덜 고생스럽게 다닐 수 있겠군.

이런 나의 생각은 아직 까페 성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초보수준이라는 것.

오히려 차 탔다가 걷는 것이 귀찮으니 그냥 내쳐 걷자는 이런 막무가내의 사람들로 변해간다는 것.

그런데 2코스가 끝나고 내일이면 귀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건만 이 여자 비행기를 다음날로 연기시켰다. 으흐흐, 이 여자도 슬슬 메조키스트로 변해가는군.

 

 

8월 4일

3코스 한라산 등반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다보니 구상나무가 멋드러지게 진을 치고 있는 곳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한계령이나 한라산이나 같은 한씨라며 한계령 노래를 아니 부르고 어찌하리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구상나무와 주목의 확실한 구별을 할 수 있다는 벅찬 감격을 안고 내려왔다.  

 

<구상나무-이파리 끝이 뭉툭하다, 줄기를 기준으로 원통형으로 돌려 난다. 가지 하나에서 새 순이 나올 때 좌우 대칭으로 난다. 열매는 솔방울 모양이다>

 

 

<주목나무-줄기를 가운데 두고 양쪽 옆으로만 퍼져 난다, 이파리 끝이 뾰족하다, 새순이 어슷하게 불규칙적으로 난다, 열매는 붉은색으로 손톱만하다>

 

  

<구상나무-줄기가 회색빛이다. 흰색 반점이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 가지런한 느낌이 난다.>

 

<주목나무-붉은 색을 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산발한 머리처럼 제멋대로 모양이다.>

 

  

8월 5일

4코스 국토 최남단 마라도를 갔다.

전교생 3명이라는 마라 분교 앞에서 사진도 찍고,

열 받으면 달리는 버릇 있는 사람(과거 나), 마라도 몇 바퀴 돌아야겠다.

그리고 마라도를 가면 짜장면을 먹어야지 절대로 냉면을 먹지 말라는 것.

동굴 탐방은 스릴 있었지만 4.3항쟁의 민초들의 질곡의 삶에 묵념.

조금만 더 했으면 눈물 날뻔 했다.  

 

<배와 등의 높이를 보시라.>

 

완전 메저키스트 되어 비행기표 한 번 더 연기.

결국은

 

 

8월 6일

다음날 계곡탐방으로 이어졌다.

용암이라 흐르는 물은 적지만 일단 비가 한 번 왔다가는 몽땅 쓸어가서 개방을 안 한다는  광령계곡에서 볼링공으로 써도 될만한 동그란 돌멩이로 볼링 폼재며 굴려 보고

칡넝굴 타고 아~~~아 타잔도 되어 봤다.

 

 

  

냇물에서 고기를 잡는 일을 천렵이라고 한다지만

우리는 마트에서 고기를 잡아와 숯불에 지글지글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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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그늘에서 몸을 누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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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털과 수염 길어진 진사마는 호기심 가득한 꼬마와 불을 피우며 원시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여행을 가면 그곳 특산물을 사는 버릇이 있는 나는

음식 대신 펑퍼짐한 갈옷을 한 벌 사 왔다.

머릿속의 제주도 기억들이 점점 바래가듯

갈옷 또한 종종걸음치는 바쁜 생활 속에서 탁한 색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용기란 놈이 엘리베이터 탄 것마냥 쑤욱 끌어 올려져 목소리에 힘이 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