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새벽 5시 반.
옆에서 자던 바루가 주섬주섬 해돋이를 보러 간다며 나를 깨웠지만
"그 해가 그 해, 맨날 똑같은 해인데뭐."
하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준비가 됐냐 어쨌냐 웅성웅성대던 7명이 썰물처럼 빠지고 난 뒤
해담이네 앞산에서 넘어 온 해가 창문을 찌를 즈음 후회가 시작되었다.
지금이라도 갈까?
앗차, 차를 놓고 왔구나.
생각해 보니 새해 소원을 안 들어 준 건 아니었다.
몇년 전 구청에서 주관하는 해맞이 행사에 갔다가 미적미적 연락이 끊어진 사람을 찾게 해 달라고 소원을 적어 넣었더니 진짜로 인터넷 두 단계를 거쳐 찾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해외에 있는 사람을.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갖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어야 했다. 아침 잠이 많은 게 죄여...
해맞이를 갔다 온 사람들은 떡국을 먹고 왔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러면서 이미 식어버린 군고구마를 내밀었다.
난 호박죽으로 아침을 때웠는데...
이른 점심으로 큰 양푼에 시래기, 김치, 밥을 넣고 썩썩 비벼 들기름도 휘휘 둘러
모두들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는 (아침 떡국 먹긴 먹은 거여?)
이럴 수는 없다.
오늘 안으로 해를 맞이 하면 될 것 아닌감?
남정네들을 놔두고 여정네, 이건 아닌 것 같고 여인네들 셋이 일월산 대티골 외씨버선길을 걸었다.
솔숲길 따라 걷기
칡이 밭을 이룰 정도로 칡이 많았다는 칡밭목 삼거리에서 옛날 국도를 타고 걸었다.
영양군청에 전화해야겠구만. 간판 틀렸시유. 칠이 아니고 칡인디유.
1980년대까지 국도였음을 알리는 "영양 28km" 이정표가 세월 따라 녹슬어 가고
1년에 한 번만 배달한다는 희망우체통이 화사하게 편지를 받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년후를 예측하며 자기에게 편지를 한 통 부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넉넉하게 받아주는 의자도 있고
여자들의 무기는 역시 수다.
뭔 얘기들을 그리도 재밌게 하는지...
그렇게 산길을 내려 오고 밤에 이어지는 윷 판.
배달이 안 되는 피자를 찾으러 시내를 가고
해담이한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두 판도 싹싹 비우고.
은마래 언냐, 피자까지는 안 쏴도 됐는데...
다음날
바루와 햇살은 어제 다 못 돈 일월산 V 자 코스를 돌러 나섰다.
얼음을 깨서 물을 받아 누룽지를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아, 근데 라이터가 없다. 담배 피는 게 부러울 땐 요럴 때 잠깐뿐.
마침 달새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점심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얏호, 물? 버려 버려."
서바이벌 촬영하듯 어렵사리 뜬 소주병의 물을 미련없이 쏟아버리고 길을 되짚어 영양 터널 쪽으로 걸었다.
달새님 언니가 끓여 준 곱빼기 칼국수를 사양도 하지 않고 국물 한 숟갈 남기지 않고 앉았는데
봉화에 귀농한 댁을 가려는 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하신다.
좋든 싫든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나, 대답대신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그래서 예상치도 않은 봉화를 가게 되었다.
길을 가다 집이 있으면 저런 집에는 누가 곰실곰실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는데 결국 난 사람에 관심이 많다는 얘길 거다.
목수인 바깥 분이 직접 지었다는 한옥에 앉아
우아를 떨며 사과밭을 내려다 보며 차를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고
근사한 저녁을 먹고
또 재미난 수다를 맛나게 떨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부석사 입장료를 아끼려 새벽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알람을 맞춰 논 건 나였다.
오늘이라도 일출을 봐야해.
새해 소망을 꼭 빌었어야 했다. 올해는 더욱 더 간절하게.
부석사에 들러 구경을 하고 다시 봉화 집으로 와서는 떡국을 끓여 먹고는 영양으로 향했다.
넉넉한 두 부부의 시골살이가 내 이상처럼 와 닿았다.
달새님은 우리(바루와 나)를 은마래님한테 인계를 하고 가셨다.
셋이서 서석지에서부터 영양 읍내까지 걷기. 약 14키로 정도?
다음날,
해담이 아빠를 자유부인, 아니다, 자유 남편으로 남겨둔 채 세명은 또 대티골 다른 코스를 잡아서 걸었다.
털갈이 하는 짐승 잔등같은 능선의 나무들은 찬바람을 맞으며 겨울을 나고 있었다.
온통 싸맨 살속으로 겨울 바람은 쉼없이 잠입했지만 그래도 여자들의 수다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드디어 차를 만날 수 있는 큰 길로 나오고
봉화터널을 지나 집으로...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시려 장갑을 벗어 뱃속에 넣고 가다가 발견한 영양터널산장.
개들이 반갑게 짖길래 걸음이 빨라졌는데, 이런 문이 잠겼네.
우리의 차가 세워진 우련전으로 원점 회귀 2시간 30분.
길 건너편 남회룡 분교까지 7.8km 는 다음에 걷기로 하고 집으로 왔다. 이 길은 전전날 차를 타고 돈 길.
이리하여 4박 5일의 영양 여행은 끝이 났는데
네이버 지도를 화면에 띄워 놓고 뽐뿌질 하는 은마래 언니,
조만간 왕피천을 걸으러 또 가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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