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남편의 도시락

햇살가득한 2020. 4. 6. 15:31

어제였다.

아침에 운동삼아 산책을 하는데 길옆 개복숭아꽃이 칙칙한 겨울 색깔을 덮고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눈으로, 마음으로 찍고는 그래도 안되겠다싶어 휴대폰으로 찍고는 다음엔 카메라를 가져와서 제대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 반찬을 할 요량으로 나뭇가지를 꺾어 꼬챙이를 만들어 고들빼기를 10뿌리 정도 캤다.

40여분 산책을 했을까? 집에 와보니 남편은 이미 밖에 일을 하느라 마당, 밭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같이 가지 혼자 갔냐구?

 

그러면 어제가 아닌 그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길래 남편에게 아침 운동을 가자고 했더니 안간다고 하는 걸 두어번 더 꼬여서 같이 갔다. 개들 4마리를 거느리고. 말 그대로 평온하게.

중간쯤 갔을까,

"단풍나무는 햇빛따라 색이 변하지 않고 원래 자기 색깔이 있는가봐."

했더니 대뜸

"그럼 잘라 버리던가?!"

하며 화를 버럭 내는 것이 아닌가.

난 어이없어서 멍하니 쳐다 보다가 집에 와서 물어 보니 아침운동 가기 싫은 걸 가서 짜증이 난 거다.

 

그래서 어제는 혼자 갔다. 멧돼지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내 전화 오면 잽싸게 받으라는 말과 함께.

그래서 갔다 와보니 일을 준비하길래 난 밥을 하고 고들빼기를 다듬어 데쳐서 무치고는 포크레인을 끌고 저 쪽으로 가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밥 먹고 일해!"

포크레인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혔을 까봐 데크에 서서 밥 먹는 시늉을 크게 해 가며.

이 남자의 일하는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며칠전 맛있게 사먹었던 된장찌개가 생각나 들어오는 사이에 된장찌개를 끓여야겠다며 물을 올려 놓고 감나무밑으로 갔다.

목욕하고 나온 아이의 생머리마냥 산발한 달래는 소복히 자라 있어서 한 삽 퍼서 털썩 내려 놓으니 흙이 떨어졌다.

머리끄뎅이 잡든 물에 얼른 씻어내어 티를 골라 내었다. 달래는 캔 즉시 씻어야 흙이나 돌 없이 잘 씻긴다. 그리고 숭덩숭덩 썰어 보글보글 끓는 된장속에 넣었다. 향이 난다.

다시 포크레인에 흙을 한 바가지 퍼서 이쪽으로 끌고 오는 남편을 불렀다.

"밥 먹고 일하라고.!"

이번엔 달래 캘 때 뭉턱 쥐어뜯어 한웅큼 되는 돗나물을 잘라 씻어서 초고추장에 무쳤다.

쟁반에 밥상을 차린다. 역시나 포크레인 엔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밥 먹자니깐."

이번엔 나가서 춤을 추듯 밥 먹는 시늉을 크게 해 가며 밭에서 소리쳤다. 그제서야 남편은 고개를 끄덕인다.

밥상을 차렸다. 그러나 역시나 남편은 오지 않았다.

슬슬 열이 나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밥 먹으라고 첫번째 소리친 뒤부터 40분이나 흘렀다.

이제 밥을 차려 주나 봐라. 안 먹으면 지만 배고프지 뭐.

내가 달래된장에 밥을 비벼 먹고 상을 치웠을 때 남편이 그제서야 들어선다.

냄새를 맡고는 온몸이 불덩이인 내게 천연덕스럽게

"된장에 비벼 먹으면 되겠네."

한다.

"난 먹었어.그리고 앞으로 밥 먹으라고 하면 하던일 멈추고 재깍 와"

감정을 덜 드러내느라 짤막하게 말한 나의 목소리에 화난 감정이 실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반찬도 없이 된장에 비볐던 빈 밥그릇을 설거지통에 넣고 나가 버렸다.

뒷마당에서 뭘 하느라 움직이길래 나가봤더니 표정에서 얼음이라도 한 조각 떨어질 것 같다.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단다.

나 때문에?

이유인즉슨 아침 일을 시작하려면 밥을 일찍 먹어야 하는데 운동갔다와서 늦는다는 거다.

아니 그러면 밥 먹으러 오라면 얼른 와야지. 뭔 50분씩이나 미적거리냐고?

내가 밥 먹으라는 소리는 한 번 밖에 못 들었단다. 음. 고개를 끄덕일 때 그 때가 처음이군.

남편은 하던 일 마치고 밥을 먹겠다는 주의고

나는 어자피 먹을 거 손 딱 놓고 밥 먹은 뒤 계속 하라는 거고. 왜냐? 밥은 식으면 맛도 없고 반찬도 뚜껑 덮어서 보관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난 제 시간에 밥을 먹어야 저혈당이 안 되므로.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건 별일 아닌데 버럭버럭 남편이 화를 낸다는 거.

"요즘 생리하냐?"

내가 물어본 말이다.

어쨌든 어제의 결론은 남편은 밥을 각자 먹자고 하고,

난 부부는 자는 것과 먹는 것은 같이 해야 하는 게 부부 아니냐고 하다가 결국은 서로 목소리 높여서 다퉜다. 그렇게 냉냉하게 하루가 갔다.

 

오늘.

오늘은 아침운동 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서는데 개들이 따라나선다.

혼자 산길을 걸으니 뭐 무섭지도 않다. 까이꺼 뭐. 멧돼지 나타나면 나라지 뭐. 노루? 갸들은 지들이 먼저 도망 갈 거고. 낯선 남자? 가 나타나면 개보고 확 물으라 하면 되지 뭐.

쉬지 않고 빨리 걷고 돌아와보니 30분이 걸렸다.

남편은 그새 어제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나는 누룽지에 물을 부어 끓여 먹고는 남편한테 갔다.

"솥에 쌀 앉혀 놨어. 밥 해 먹어. 미리 쌀 불려 놓으면 맛없어질까봐 씻지는 않았어.나 출근할게."

남편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

코로나로 사무실도 각방에서 쓰라하고 점심도 모여 먹지 말라해서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고 라면에 김치 하나만 달랑 들고 왔더니 인덕션은 있는데 정작 냄비가 없다.

라면을 전기난로에 구우며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이쪽 사무실로 지난갈 일 있으면 밥 좀 갖다 줘.

"밥만 갖다주면 돼?"

"아니 어제 볶은 멸치랑."

젓가락도 없다 했더니 차에서 주섬주섬 어느 틈에 박혀 있었는지 종이 껍데기가 때가 끼어있는 나무젓가락을 건넨다.

뚜껑을 열어보니 밥과 멸치 외에 계란 후라이 한 개가 올려져 있다.

 

도시락을 건네고 돌아서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이로써 일박 이일의 밥때문에 싸운 신경전은 그의 입꼬리로 막이 내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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