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상다반사

너도 고장난겨?

햇살가득한 2011. 7. 10. 20:50

 

  옥상에 올라가보니 촌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가 심어 놓은 도라지 몇 뿌리가 보라꽃을 피워 냈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한지에 통꽃의 별모양 도라지 꽃을 보랏빛으로 색칠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도라지 꽃을 이렇게 저렇게 각도를 달리해서 무던히도 많이 찍어 뒀다. 풍선처럼 부푼  채 벌어지지 않은 꽃망울도.

  여주에 심어 놓고 봄에 김을 한 번 매 준 도라지는 제법 무리지어 폈겠다 싶어 촌집 마당의 풀을 뽑을 겸 빌린 카드를 되돌려 줄겸 촌집엘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고장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운전을 하고 한참을 가서야 카메라를 안 가져나온 걸 생각 해 냈고 촌집에 도착해서 아쉬운대로 휴대폰으로 원추리니 오이니 질경이를 찍어대니 카메라에 대한 갈증만 더한다. 

  식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지난주에 미처 발결하지 못한 오이는 누렇게 늙어가고 있었고 꽃을 피웠던 오이도 손바닥만하게 자라서 두 개를 땄다.

  "음, 촌에 사는 맛은 이런 거야."

  오이를 베어 물었더니 하우스에서 자란 놈들보다 더 단단하다. 머리 산발하듯 웃자란 토마토 순을 질러주고 옥수수도 한 대만 남겨두고 솎아주고 지멋대로 기세좋게 뻗어 나가는 호박도 갈 길을 정해 주었다.    

  질경이는 질긴 놈들이라 질경이라 이름이 불렸는가? 비 온 뒤라 다른 풀들은 호미를 대지 않고 잡아 뽑으면 쑥 뽑히는데 질경이는 줄기가 끊긴다. 그런데 이놈들은 그 끊어진 줄기에서 또 새로운 이파리가 나와서 정말 질긴 생명력을 이어간다. 질경이는 호미를 써서 더디고 힘이 더 들었다. 

  예전에 내몽고를 갔을 때 그 외진 곳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국인을 본적이 있었는데 구한말시대 때 이주하여 그 먼 곳에서 살아 남은 그가 난 질경이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밟을 수록 더 잘 자라는 질경이.

  쭈그리고 앉아 질경이를 캐다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한참을 캤는데도 겨우 앉은 엉덩이 정도만 캐 낸 걸 보면 허무하기도 하다. 비는 계속 올테고 녀석들은 기세등등하여 자기 영역을 넓혀 갈 것이니 다시 호미를 잡고 쭈그려 앉는 수밖에 없다. 

  고장 두번째다. 

  내가 가르치는 애들한테 내 주머니를 털린다는 것은 정말 도덕 교과서를 불살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배신감을 느끼기에 가방과 지갑을 늘 분리해서 놓는다.

지난주에도 가방 따로 지갑 따로 두었는데 퇴근하고 차에 기름을 넣으면서 내가 지갑을 안 챙겨 나온 걸 알았다. 다행히 비상금으로 넣긴 했는데, 그 날 강원도를 가는 중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여차저차 얘길 했더니 카드까지 준다. 날 뭘 믿고는. 

  빌린 돈과 카드를  오늘 되돌려줘야했는데 빌려줘서 고맙다고 준비한 매실 한 병과 땅콩 등을 갈아 넣어 만든 쌈장, 아저씨가 좋아하는 과자만 건네고 돌아서려는데

  "카드는 안 쓰면 주시죠?"

하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웃긴 건 그저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자기 식판을 그냥 놔두고 따박따박 걸어가는 옆반 선생 얘길 막 하고 난 뒤였다. 

  "어쩜 밥을 먹고 자기가 먹은 식판을 들어 잔반을 버린다는 걸 숟갈 놓으며 깜빡할 수가 있어요."  

하고 말이다. 으이구, 카드 돌려 주러 왔으면서.

  질경이와 씨름을 한 판 더 한 뒤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려 문을 잠갔으나 역시나 다시 문을 열어 전기 차단기를 내리고는 다시 문을 잠갔다. 

  학교 다닐 때도 우산 한 번 잃어버리고 다닌 내가 아니다. 등교길에 비가 오다가 하교길에 해가 날 때 우산꽂이에 꽂혀 있는 우산을 보면 그래서 이해가 안 된다. 

  "난 니들 때는 이러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서른 다섯쯤이었을까? 지갑을 잃어버리고는 우리집 어딘가에 블랙홀이 있다고 우겼고 그 후로 자동차 열쇠도 잃어버리고 난 뒤에는 블랙홀은 운운하지 않는다. 출근할 때 현관문을 잠갔다가 열었다가를 몇 번 하는 건 기본이고 그럼에도불구하고 뭔가가 빠져 있다는 사실. 그래 서른 다섯쯤부터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겨난 거야. 애들이 칼장난으로 지우개를 잘게 잘라서 튕기는 게 내 머릿속에 튀어 들어 온 걸까? 그게 커지고 있는 걸까? 성능 좋게 싹싹 지우고 있는 걸까? 지우개 똥처럼 흰 머리카락도 밀어 올리면서. 

  촌집 대문을 잡아 걸고는 차에 시동을 켰다. 얼마쯤 가다보니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결국엔 빗방울이 투둑 떨어진다.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왼쪽, 그러니까 운전석에 있는 윈도우브러쉬가 아래로 내려가더니 올라오지를 않는다. 조수석의 그것은 운전석의 윈도우브러쉬를 타 넘고. 차를 세우고 작동시켜 봐도 녀석은 패대기쳐진 개구리 마냥 벌벌 떨기만 할 뿐 움직여주지를 않는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아직 20여 키로나 더 가야 하는데. 운전석의 윈도 브러쉬를 위로 고정시키고 조수석의 것만 켰다. 조수석의 윈도브러쉬는 빗물을 운전석으로 몰아주고는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한다. 나는 흐물흐물 거리며 왼쪽으로 이동하는 빗줄기를 피해 몸을 오른쪽으로 잔뜩 기울이고 조수석의 앞 유리를 보며 운전을 한다. 주말이라 길이 막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5년이 넘은 내 차, 너도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는구나. 문득 나의 생명은 언제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갑자기 시한부 인생의 소녀같은 생각이 들어서 잊고 지냈던 옛 애인한테 잘 살라는 말을 남겨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거다. 그래. 유언장을 미리 써 보는 것도 괜찮지. 자기 삶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테니까. 뭐 이런 약간은 코믹하고도 무게있는 생각을 해 대는데 그 때 라디오에서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beautiful life 음악이 나온다. 볼륨을 최대로 올리고 기우뚱한 몸체를 들썩 거리면서

  "그래, It's a beautiful life 야."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점점 커지며 또 성능 좋은 지우개로 변해 갈 것이며 풀을 뽑다가 자주 허리를 잡으며 일어서는 날이 생길 것이고 날이 꾸물거리면 비가 올랑가 하면서 옥상의 빨래를 걷는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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